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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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 서머싯 몸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카타 우파니샤드
인도의 철학적 사상을 엮은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이다. 다소 종교적인 의미를 담은 구절이기는 하나, 구원을 자기의 완성으로 놓고 본다면 무엇을 이야기 하고싶은 지에 대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위대한 소설들은 항상 첫 문장이 강렬하다고 했던가. ‘면도날’이라는 작품에선 이 구절처럼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었던 여러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을, 그것도 장편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여간 어지러운 작업이 아니다. 등장인물도 많거니와 그들의 수많은 행동과 대화를 마냥 피상적으로만 읽고 넘길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소설에서는 한 명의 인물 ‘래리’가 날카로운 면도날을 걷는 모습이 집중적으로 조명 되었다면, 나는 그의 약혼녀였던 ‘이사벨’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사벨은 브래들리 가의 딸이자, ‘엘리엇’이라는 사교계에서 명망 있는 인물을 외삼촌으로 두고 있다. 또한 좋은 집안의 래리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종사였던 래리가 전쟁에서 돌아와 도통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탓에 결혼을 미루고 있다. 이사벨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둘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마땅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래리를 만나 목표가 뭐냐고 물어봤지만, 래리는 목표를 모르는 게 문제라고 대답한다. 이사벨은 작가에게 래리의 과거를 알려주게 되는데, 래리의 전우가 래리의 목숨을 구하다가 대신 죽은 사건과 래리의 지금 모습이 관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래리는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사교계에 입문 시켜주겠다는 엘리엇의 말, 학교로 돌아오라는 양아버지 넬슨 박사의 말을 거절한 채 책만 읽으며 살아간다.
결국 이사벨은 약혼을 취소하고, 그녀를 줄곧 흠모해왔지만 표현할 수는 없었던 ‘그레이’라는 인물과 결혼한다. 증권회사를 가지고 있던 그레이 집안은 엘리엇과 함께 좋은 팀을 이루어 큰 돈을 벌게 된다. 한편 래리는 구도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간다. 2년이 지나 작가, 이사벨, 그레이, 그리고 부랑자 행색이 된 래리는 파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여인인 소피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녀는 교통사고로 아이와 남편을 잃고 나서 술에 의존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아무 남자하고나 자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서 래리는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수하고 활기찬 영혼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하였고, 래리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사벨은 결국 결혼 전 드레스를 골라준다는 핑계로 소피를 만나 술로 유혹하였고, 그녀는 술에 취해 다시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소피는 계속해서 떠돌이 신세로 살다가 훗날 알몸에 칼이 찔린 주검으로 발견된다.
앞서 전개된 내용은 이사벨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이다. 어찌 보면 소설 안에서의 유일한 악역이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설명 해보자면 예쁘고 똑똑한 데다가 주체적으로 삶을 나아간다. 인생의 크고 작은 풍파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새로운 돌파구를 항상 마련하였다. 세속적인 부와 사회적인 성공을 삶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래리가 방황할 때마다 계속해서 설득해보기도 하였다. 래리와의 결혼은 실패했지만 새롭게 인연이 된 그레이를 진심으로 대한다. 그레이가 잠시 파산으로 힘들어했을 땐 진심으로 그를 지지하였고, 힘든 과거로 인해 탈선하는 소피에 대해서는 따끔한 충고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래리를 좋아하고, 훗날 래리가 수양을 하며 쓴 책을 읽으며 그를 이해하고자 했다. 따뜻한 마음씨까지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똑 부러졌으며, 결국엔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었으며,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간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강렬했던 첫 문장과는 사뭇 다르게 소설의 끝은 극적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수선하게 끝맺어진다. 하지만 인물의 성공담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모든 인물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얻었고, 이사벨은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었으며, 래리는 행복과 자기 완성을 얻었다. 더군다나 소피까지도 죽음으로 그녀의 아픈 삶을 끝맺을 수 있었다. 작가는 작가답게 이 모든 걸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그들 모두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내가 이사벨에 집중해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녀가 대부분의 사람들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래리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 유형이라면, 이사벨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한 유형에 가깝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은 래리처럼 세상이 정해준 기준을 아예 탈피하여 살아가기보다는 정해진 틀 안에서 자신이 살고싶은 방향을 정한다. 그리고 적당히 맞춰가며 적당히 슬퍼하고 적당히 기뻐하며 살아간다. 이사벨 역시 원하는 것을 가지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응원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변화에 긍정적인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변화는 탐탁지 않아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 고귀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내가 오랜 시간을 견뎌온 물건, 음악 같은 형태를 계속해서 찾는 것도 변화하는 것에 대한 싫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뀐다는 것은 변치 않는 것만큼이나 멋진 일이다. 크고 작은 일들이 연결되어 사람이 바뀌는 모습을 담아낸 이야기는 내게 변화하는 삶도 충분히 멋짐을 알려주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계속 바뀌고 있다. 그 안에서 더 행복하기 위해 변화하려는 나를 애써 모른척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겠다.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어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니까. 하지만 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그것 역시 시원하고 상쾌한 건 틀림없어요.
- 459 페이지, 래리와 작가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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