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나, "보통의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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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 기호는 Signifier (기표)와 Signifie (기의)로
구성되어요.
Signifier는 프랑스어로 ‘의미하는 것’, Signified는 ‘의미되고 있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죠. 그리고 사실 이 둘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요.”
- 2013년, 한보희 문학 박사의 <사랑의 담론> 수업 中
한 때 인터넷 상에서 ‘게슈탈트 붕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어떤 단어를 곱씹고 있으면 그 단어가 왜 그 단어인지를 되묻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 용어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대상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그 대상에 대한 개념 또는 정의를 잊어버리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는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그 단어에 대한 고찰을 깊이 하는 경우는 많이 없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더 그렇다. 단어 암기에 바쁠 뿐이지 왜 그 단어가 그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2013년, KAIST 입학 이래 처음으로 수강했던 교양 수업 <사랑의 담론>에서 교수님의 위 말씀은 그 당시의 내게 있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 그러나 생각해보면 기이한 것이었다. 왜 학교는 ‘학교’인 것이지? 왜 책은 ‘책’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저 사회적인 약속일 뿐인 것이다. 책이라는 단어와, 책 그 자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새인가 우리 세상에 스며들어 너무나 당연해진 언어를 통해 관성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한다. 그리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표를 나열한 의미 전달로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 글이다. 그리고 그곳에 적절한 음의 높낮이를 실어서 감동을 주는 것은 ‘노래’이다.
책 <보통의 언어들>의 작가이자 유명 작사가로 활동하는 김이나 작사가 역시, 기의를 아름답게 전달할 수 있는 기표의 조합을 수도 없이 고민하고 있을 사람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감정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언어를 골라서 소통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같은 말을 하더라도 감정이 다행히 전달되기도, 혹은 곡해가 발생하거나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 글자(기표)는 의미(기의)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일대일대응 관계일지는 몰라도, 그것의 조합으로 생기는 ‘문장’은 글자에 대한 임의의 함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리라.
“인간의 언어는 파동이 아닌 글자로 존재하기에,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감정이 전달되기도 하고 곡해되기도 한다.
감정이
언어라는 액자 안에서만 보관되고 전달된다면, 나는 이 액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액자를 공유하는 것이 진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에.” – 본문 Prologue 中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카테고리에 속한 이상, 우리는 때때로 (어쩌면 훨씬 자주) 우리들이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는 언어라는 액자를 억지로 변형하거나, 억지로 교체해야만 하는 일을 겪곤 한다.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것이 아닌데, 상대방은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서 난감해질 때. 그러나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나 욕망이 있거나, 혹은 그 사람이 내게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일 때 (예를 들면 내 고과를 평가하는 직속 상사라든가), 우리는 억지로 내가 잘못된 액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곤 한다. 혹은 서로의 액자를 들여다보려 하면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오늘 하루조차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음이 잘 통하는 대화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귀한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액자에 억지로 자신의 틀을 맞추거나, 혹은 깨져가는 자신의 액자를 붙잡고 마음 아팠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손에 쥐어주고 싶다. 언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깊이 곱씹으며, 내가 아주 틀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위안 삼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아, 다소 철학적인 내용을 우겨서 넣느라 글이 조금 두서가 없어 보였다면, 그 역시 내가 가진 액자가 조금 특이한 것뿐이라고 해 두고 싶다. 아무튼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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