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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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시간이 흘러 싹이 움트는 계절이 왔다. 우리는 겨울을 지나며 무엇을 배웠으며, 앞으로의 날들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 45 쪽
춥고 시린 계절일수록 오히려 따뜻함을 배운다. 비슷하게는, 비극 안에서 사랑이 더 선명히 보인다. 한강 작가의 바람대로 이 소설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 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비극이라는 점은, 그 안의 사랑을 먹먹하게 한다. 비극은 우리 인생을 후회의 소용돌이로 집어 넣는다. 비극을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극을 빗겨가지 못했던 우리의 그 때까지 후회하는 것은 비극의 또 다른 비극이다.
두 여자가 있다. 그들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가면서 살아간다. 문득, 살아가는 와중에 계속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살았던 적이 있나 생각을 해보면 그들의 무거운 마음을 쉬이 헤아릴 수 없다. 겨우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엔 또 사라져가는 이유들에 지쳐있는 ‘경하’에게 ‘인선’에게서 연락이 온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의 진심 어린 부탁에 삶이 움직이기도 한다. 제주도에서 혼자 목공 일을 하다가 전기 톱에 손이 잘려 의식을 잃게 된 인선은 봉합 수술을 위해 육지로 오게 된다.
제주 집에 가줘, 라고 인선이 말했기 때문에 나는 여기까지 왔다.
언제? 내가 묻자 인선은 대답했다.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 안그러면 죽어.
누가?
새.
그날 바로 경하는 김포공항에 몸을 싣고 인선이 사는 집으로 향한다. 눈이 너무 많이 와 중산간 지방으로 가는 차편도 마땅히 없으면서 무모하게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 친구의 부탁, 그리고 살려야 하는 생명 하나.
내가 구하러 왔어.
부드러운 것이 손 끝에 닿는다.
더이상 따스하지 않은 것이.
죽은 것이.
(중략)
인선의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평행 우주가 존재한다면 나는 지금 서울 근교의 아파트의 침대에 웅크려 누워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있을 거다. 인선은 싱글 매트리스에서 잠들어 있거나 안채의 부엌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거다. 암막 천에 덮인 새장 속 횃대에 아마가 발을 걸고 있을 거다. 잠든 몸이 어둠 속에서 따스할 거다.
그게 멈춘 게 언제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그 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 149 쪽
새는 덩그러니 홀로 주인을 기다리다가 죽어버렸다. 도와주러 올 이웃은 없다. 이곳의 마을은 예전에 군경들에 의해 모두 불타버려 인선의 집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비극은 살아있고 비극은 비극을 낳는다. 대를 이어오는 이 비극을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인선의 왠지 모를 우울감은 그녀의 엄마를 닮아있다. 우리는 결국 이 비극과 작별할 수 없는 것일까?
책을 읽다 문득 작별할 수 없다, 가 아니라 작별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와 작별할 수 없으며, 비극으로부터 작별할 수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해를 찾으려 일생을 바쳐온 인선의 어머니도 역시 남편과 작별할 수 없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있게 할 수는 있다. 이것이 비극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더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 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 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 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인선이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 31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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