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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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 우다영
많은 것을 해결해야 하는 2022년이 밝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부담감과 함께 산다고 느껴질 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자 찾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주와 윤회다. 거대한 우주에 놓여있는 작은 생명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지금 나를 짓누르는 걱정들이 도대체 무슨 대수인가 싶다. 윤회의 관점에서 우주를 보면, 우주의 모든 원자가 다시 동일한 공간 속에 놓여있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어디까지나 확률적인 접근으로) 또한 정의할 수 있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억겁의 시간이 흐른 어느 먼 훗날에는 똑같은 세상이 펼쳐진다는 막연한 기대가 생긴다. 다시 돌아올 사건들이라면 시작과 끝에 대단한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면, 다음 단추부터 잘 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2022년을 맞이해본다. 물론 다소 불교적이며 공상적인 내용에 대해 믿고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생각들로 내게 묻어있는 긴장을 털고 담백한 마음가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환기이지 않을까?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이러한 내 취향에 맞는 SF적인 설정이 가미되어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다루는 주제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옳고 그름에 대한 고찰이다. 소설은 지구의 특정 인물들이 “각성자”가 되는 설정을 따르며, 각성자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인터뷰로 내용이 구성되어있다. 각성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생을 기억한다. 즉, 그간의 모든 영혼이 축적되어 깨달음을 얻은 평온한 성자들 인 것이다.
Q: 전생들의 기억은 선명한가요? A: 그런 편이에요. 비각성자의 기억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에요.
Q: 전생의 기술이나 능력을 지금도 사용할 수 있나요? A: 네.
Q: 전생에 살인을 한 적이 있나요? A: 네.
Q: 살해당한적은요? A: 무수히 많아요.
Q: 그 생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어떤가요? A: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말씀하시는지...
Q: 이를테면 분노요. 살해당하거나 원한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생을 살던 입장으로서의 감정을 여전히 느끼나요? 기술이나 능력이 영혼에 담겨 전승되었듯이요. A: 아, 감정은 느껴요. 느끼지만, 대체로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죠. 한 생 에서라면 지당하고 명백했을 인과들이 고차원의 형태로 겹쳐지며 공중분해 되거든요. 복잡해지고, 복잡해지다가 결국 사라져요.
Q: 당신의 기억과 능력을 인류를 위해 사용할 용의가 있나요? A: 전혀요. 그건 옳지 않으니까요.
- 연구자와 각성자의 인터뷰 中
학자들은 각성자들이 과거의 생 뿐 아니라, 미래의 생까지 직감보다 더 훌륭한 수준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각성자들은 영혼들의 관계가 생을 거듭하면서도 계속해서 윤회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까지나 관찰자 입장을 고수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각성자들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영혼들의 관계가 식물의 생태계와 닮아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식물학자 ‘곤’을 영입하게 되는데 곤은 자신을 식물학자가 아닌 삼림학자로 소개되길 좋아했다. 그는 연구원들에게 숲의 나무들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몹시도 설명하고 싶어했다. 전나무와 자작나무가 땅속 뿌리 균근으로 탄소를 교환하는 일,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하는 조건에 놓이거나 잎이 다 떨어진 시기의 위태로운 나무에게 양분을 나눠주는 일이 마치 여러 영혼이 연결된 각성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는 신선한 관점에서 새로운 가설과 아이디어를 제시하였고, 나와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 '숲'과 '각성자'의 공통점이라고 말한다. 식물은 다른 개체까지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분을 나눠준다. 하지만 숲의 관점에서 보면 숲은 나무 일부를 잃는 것에서 죽음을 느끼지 않는다. 숲 전체의 생명력에 집중하는 것이다. 어떤 나무가 베어질 지, 불 탈지는 인과가 불분명한 불운의 문제로 여길 뿐이다. 숲은 불운을 인정하고 나무들은 허무한 죽음을 인정한다. 이는 각성자들 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생이 반복되고 인연이 반복된 영혼들은 상대를 사랑하고 증오하며 서로에 대해 수없이 생각한다. 서로를 알게 되며 기억과 마음이 뒤섞인다. 때로는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며 인과 역시 뒤섞인다. 감정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거리가 0이 되면서 사랑과 증오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소설은 끊임없이 각성자에 대해 연구했던 주인공 자신이 각성자가 되면서 끝난다. 그녀가 정말로 탐구하고 싶었던 그들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소설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해왔던 ‘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디까지나 ‘선’은 그 결과까지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마치 알레르기와도 같다. 자가면역 반응이 우리 몸을 해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한 선함 때문이다. 우리가 선이라고 믿는 행동들에 얼마나 무거운 대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이야기를 통해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가 믿는 옳고 그름이 사실은 편향 되어있는 하나의 영혼의 결론이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바꾸려 들 필요는 없다. 각성자들이 하나의 영혼 안에서 살아가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여러 생에 거쳐 다양한 이념에 집중했어요. 신실한 신학자일 때에는 나치에 가담해 유대인을 혐오했고, 미국 남부 농장에서 태어난 흑인일 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며 아내와 딸을 때리기도 했어요. 동물애호가 일 땐 장애를 가진 오빠를 유기했고, 환경과 생태계를 위해 여생을 바친 이번 생에서는 레즈비언인 어머니를 평생 용서하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내가 각성하기 1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삶들이 반복되는 세계는 대체 어떤 모양일까요? 왜 우리는 무언가를 애호하고 무언가를 혐오할까요?
- 어느 각성자의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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