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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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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3,074회 작성일 21-10-0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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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초중반의 나는 이상하리만큼 ‘속도’에 집착했다. 남한에서 고등학교를 3년 졸업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인데도 단지 내 주변 대부분이 고교 2학년만 마치고 진학한 과학고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그만큼 뒤쳐졌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 친구들 대부분은 기초필수 과목 대부분을 어느 정도 배우고 들어왔기 때문에 학업적인 측면에서도 나보다 훨씬 앞섰다는 점이 그러한 내 마음을 더 채찍질했던 것 같다. 사정상 학부 졸업 후에 바로 취업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군대 2년을 갔다 왔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왜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이 더딘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고 뱅뱅 돌았다. 

한편으로는,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내 고질병이 하나 있는데, 청취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갈 때는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내용이 조금만 길어지거나 복잡해져도 말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것이 굉장히 느린 편이다. 어느 정도냐면, 고교 시절 언어 영역 (지금은 국어 영역)에 사실상 무조건 맞춰야 하는 듣기 5문제 중에 무려 3문제를 연달아 틀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고3 모의고사에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수업이 대부분 영어로 진행되는 KAIST에서는 한글로 들어도 어려운 내용을 영어로 들으려니 수업 시간에 아무리 집중해도 제대로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리고 매번 독학하는 느낌으로 전공 서적과 렉쳐 노트를 공부하기 일쑤였다.

스스로 이런 말은 하는 것은 굉장히 낯 부끄럽지만,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학부 시절의 나는 우등생 그룹에 속해 있었다. 성적 우수 장학금도 몇 번 받아보았고, (아직도 그 기준이 도대체 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석사 우수 신입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앞의 문단에서 소개한 내 이야기를 주변에 하면 당연히 돌아오는 반응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라는 둥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룸메이트한테 ‘대체 대학까지 와서 왜 그 따위로 사냐’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진도를 따라가는 데에 매달렸던 서러운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너는 쉬면 안된다고, 지금도 뒤쳐졌다고 계속해서 다그쳤던 어두운 일면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학부 3학년 말부터 나는 점점 지쳐갔던 것 같다. 유명 개그맨 유재석이 오랜 세월 무명으로 버티고 있는 개그맨 후배들에게 “달리는 말에 너무 채찍질을 하면 말도 아파요.”라고 한 적이 있다. 나한테 채찍질만 가했던 그 시간은, 어쩌면 지금도 나를 심심할 때마다 찾아와 괴롭히는 늑골염을 유발한 것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내 가장 큰 경쟁력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무엇을 하더라도 한 번에 되지 않았기에 한 번 더 고민할 수 있었고, 

한 번 더 준비할 수 있었으며, 한 번 더 숙성시킬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단단해진 내공과 깊어진 공감 능력은 

좀 늦게 도착한 목적지에서 어렵게 찾아오는 기회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다. – 본문 中

 

“남들보다 오래 걸리는 사람.” 이 책의 저자인 김경호 (MBC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이자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책의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글로 저 4어절의 문장을 새겨 놓았다. 속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패배자’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책에 ‘패배자’로서의 자신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화를 풀어 놓았다. 대학은 ‘당연히’ 재수를 했고, 방송기자 공채 시험은 3년 동안 7번 떨어진 뒤 8번째 공채에서 간신히 합격했다. 지금 맡고 있는 MBC 뉴스데스크 앵커도 첫 오디션을 본 이래로 10년 만에 얻게 된 자리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항상 목표를 이룰 때까지 인내하는 시간이 길었다고. 책장을 넘기며 뭔가 내 자신을 마주하는 것 같아서 반갑기도,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것이 끝난 뒤의 감사한 마음도 컸다고 한다. 기다림이 힘든 이유는 기약이 없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내공이 깊어지고 그것이 끝났을 때의 그 시간의 소중함을 누린다는 것은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진짜 행복일 거라고.

 

아프면 아픈 얘기 그 모든 순간순간 나만의 이야기야 멈추려 하지 마

분명 날아오를 기회가 와 좀 늦더라도 내 눈가의 주름 깊은 곳엔 뭐가 담길지

궁금하지 않니 답은 조금 미룬 채 지금은 조금 더 부딪혀봐


작곡가, 프로듀서이자 가수 윤종신의 노래 ‘Slow starter’의 가사이다. 기다림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을 믿는 것이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지만, 한 편으로는 나를 가장 존중해야 하는 사람 또한 내 자신일 것이다. 아프면 아픈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뒤쳐지면 뒤쳐진 대로, 그 순간 순간이 내 자서전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중일 것이다.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슬로우 스타터들이 언젠가 깎여 나가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세공이 되어 가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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