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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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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3,193회 작성일 21-09-0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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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은 '어림'을 사랑하는 사람을을 위한 책입니다. 

'어림'에는 여림, 맑음, 유치, 투명, 슬픔, 위험, 열렬, 치졸, 두려움, 그리고 맹목의 사랑 따위가 쉽게 들러붙죠.

 척하거나 떨어뜨려 두려고 하는 것들이요. 진짜 삶은 어림이 깃든 시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어림에서 멀어집니다. - 작가의 여는 글


인터넷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이불킥'이라는 단어가 있다. 과거의 자신, 특히 어릴 적의 철없었던 자신이 저질렀던 부끄럽고 유치한 행동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수치심을 못 이기고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차는 것을 표현한 단어다. 어찌 보면, 이 산문집은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어렸던, 혹은 남이 어렸던, 그래서 저질렀던 자신의 실수나 치부 등을 과감하게 드러낸 책이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가 피하거나 외면했던 그 시절을 새기고 대면하기 위해서 적은 글이기에 그렇다.


워낙 과감하게 풀어낸 이야기가 많기에, 여기에 풀어놓기에는 다소 민망한 이야기들도 꽤 있다.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와의 애증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었던 일련의 일들, 그리고 다른 의미로 다소 '민망한' 이야기들, 지하철 안에서 자신이 혼자 남을 오해해서 얼굴이 붉어졌던 일, 사랑에 빠져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았던 시절에 있었던 일.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거나 해봄직한 실수들, 소위 '흑역사'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또는 자신이 등단을 앞두거나 등단 이후 썼던 초기의 글들을 적어놓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작가의 용기에 감탄하며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학계에서는 햇병아리 신세도 면하지 못한 나라고 해도 누군가 내 석사 학위 논문을 교보문고에 놓았다고 하면 수치심에 내 침대 이불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지 않고는, 아무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뭔가를 느낄 수 없어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려면 아주 강해져야 하죠." - 메이슨 커리, <예술하는 습관> 中


요새 나는 '처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 무엇일까. (비록 아직도 해매고 있지만)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리고 앞으로 더 높이 올려줄 원동력이 무엇일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처음 무언가를 해냈을 때, 그것에 대해 부끄러움이 덜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면 '이불킥'을 하는 일도 많지만.) 


군 시절 한창 캘리그라피에 빠졌을 때, 나는 그저 붓을 놀리는 것이 너무 재밌고 글씨를 쓰는게 너무 재밌어서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운 글씨가 나오면 보여주거나 휴가 나와서 인터넷에 올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때의 작품들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에는 그냥 그것이 너무 재밌고 뿌듯해서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거리낌이 없는 이러한 자세 덕분에 캘리그라피 실력은 빠르게 늘었고, 나중에는 강남 가로수길 어느 갤러리에서 단체 전시전에 참여하거나 교내에서 강의를 하고 외부 행사에 참석하는 수준까지 올랐더랬다. 


석사 논문이 ReRAM으로 거의 확정되었던 시기, 처음으로 ReRAM 특성을 B1500A에서 관찰하는 데에 성공했을 때 흥분해서 그 때 자리에 남아있던 선배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더랬다. 어느 정도 더 파악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보였던 메모리 특성은 사실 비공식 미팅에서 보여드리는 것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에는 그저 그것이 좋았다.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도리어 지쳐갈 때 즈음 한 번씩 달달한 감초로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어리다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타이밍이 한 템포 늦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림'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앞으로 나아간 이후 돌아보면 부끄러울 자신이 가장 작았던 시절을, 최소한 그 순간에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앞은 부끄럽습니다. 등을 보고 있을 때가 좋습니다. ...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騷亂)은 우리의 소란(巢卵)이 될 테니까요. - 본문 中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 단계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지금 겪는 모든 소란(騷亂)은 결국 미래의 자신에게 소란(巢卵)이 되어 돌아올 것을 믿자. 나중에 이불을 몇 장을 찬다고 한들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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