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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부 하나님 - 팀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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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호
댓글 0건 조회 3,018회 작성일 21-10-05 01:10

본문

누가복음에는 탕자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가 실려져있습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나가서 모두 탕진해버리고, 아버지께 돌아가 용서 받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유산을 탕진한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재산을 탕진한 아들을 죄 짓는 인간으로 비유하고 그를 받아준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비유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죄를 짓지만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으로 흔히들 이해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이야기에는 세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아버지, 집을 나간 아들, 그리고 집에 남아있던 그의 형.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인 체계를 완전히 무너트리기 위해 사용하신 진취적인 비유였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크게 두개의 파트로 나뉩니다. 먼저 1부에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말합니다. "아버지, 당신 재산에서 내 몫을 주시지요." 작은 아들의 발언은 지금 시대에 봐도 무례하지만 당시 중동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당시에 재산은 땅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유산을 달라는 의미는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땅을 팔아 동생에게 그 돈을 주어야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중동에서는 소유하고 있는 땅의 크기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이를 요구함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또한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는 말은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크게 다를바가 없습니다. 작은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나 자존심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그의 소유물을 사랑했기 때문이죠.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을 원했지 아버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작은 아들의 무례함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대응에 더욱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야기 속 아버지는 다른 중동의 아버지처럼 아들의 무례함을 훈계와 매로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시선 아래에 자신의 명예와 귄위를 실추해가며 땅을 팔았고, 작은 아들에게 그의 분량을 모두 주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몫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탕진하죠. 궁핍함 가운데 고생하던 아들은 돼지우리에서 먹이를 훔쳐먹는 처지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 자신이 일으킨 손해를 자신의 손으로 갚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 자신의 노동으로 아버지에게 입힌 손해를 회복시키고자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아들에게 뛰어가 그에게 입을 맞추고, 아들이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줍니다. 아들은 자신이 구상한 계획을 이야기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노동 없이도 그를 아들의 지위로 복귀시켜 줍니다. 아들은 노력 없이 아들로 복귀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오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잔치를 벌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날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작은 아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을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고, 내키는 대로 살고 싶고,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언젠가 작은 아들처럼 집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준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그들을 집으로 부르시고 온전히 자녀로 삼으십니다.


1부의 끝에 들어서면 모든 갈등이 해소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은 집으로 돌아왔고, 가족은 재회했으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작은 아들의 재회는 아버지와 큰 아들 간의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2부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큰 아들은 밭에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종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고, 종을 통해 자신의 동생에 집에 돌아왔으며 아버지가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열었음을 듣습니다. 형은 분노했습니다. 그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화가났죠. 잔치에 참여하지 않음은 이 가정의 일부가 되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자신은 동생을 받아드리지 않겠으며 그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드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죠.


결국 큰 아들을 부르기 위해 아버지가 직접 나섭니다. 큰 아들은 자신이 몇년간 아버지를 섬기는 동안 자신을 위해 염소 한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으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는 어찌 살찐 송아지를 잡아줄 수 있냐고 말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고 마을에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지금 아버지가 매운 기쁜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큰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은 안중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그의 분량대로 유산을 주는 순간, 아버지가 소유한 나머지 모든 것은 큰 아들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의 귀한은 큰 아들에게는 재산이 줄어듬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상실과 기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자신의 유산을 허락 없이 썼다는 것에만 신경쓰고 있습니다. 결국 큰 아들도 아버지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소유물에만 관심이 있었죠.


큰 아들이 마을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잔치의 호스트인 아버지가 그를 부르기 위해 직접 자리를 비우는 일은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창피하고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 아들이 진정으로 잔치에 참여하길 원하셔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큰 아들에게 갔습니다. 떠나간 작은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왔지만, 큰 아들도 떠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돌아오게 해야했죠. 이 큰 아들이 어떻게 대답할지, 과연 이 가족이 사랑으로 화합할지에 대해 마음 졸이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 비유를 끝내버리십니다. 결과를 말해주지 않으시죠.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1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죄에 관한 묘사를 봅니다. 동생이 아버지를 모욕하고, 매춘과 사치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쓰고, 결국 돼지우리에 가는 처지에 가는 것. 이것은 딱봐도 죄입니다. 하지만 2부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고를 뒤집어 엎으십니다. 분명 한 아들은 착하고, 한 아들은 나빴는데,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원하지 않고 그의 소유물만을 탐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둘단 재산과 신분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했을 뿐이죠. 한명은 못된 행동으로 그것을 이루었고, 다른 한명은 선행으로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초청을 거부할 때 처음한 이야기는 자신이 '몇년간 아버지를 섬겼다'는 것 입니다. 즉, 큰 아들의 선행이 그와 아버지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진정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부류는 작은 아들에 속하는 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큰 아들에 속하는 종교인 지도자들, 율법교사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허례허식에 목을 매며 자신들을 죄인들과 다르다 구별하며, 스스로의 선에 잡혀있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셨습니다. 너희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기 위해 순종하는 큰 아들과 다를바 없다. 이러한 메시지는 비단 2천년 전 이스라엘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종교인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고 닮고자 하는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큰 아들과 다를바 없는 삶을 삽니다. 그들은 교회에 꾸준히 참석하고 여러 행사와 형식을 지키면서,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재산을 얻고 건강을 얻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행실에 기뻐하고, 자신의 희생과 헌신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작은 아들이 객지에서 궁핍하고 고통 받을 때, 누가 작은 아들을 찾으러 집을 나섰어야 했을까요? 바로 큰 아들 나섰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들을 잃고 상심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큰 아들은 집을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물려 받을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써서 작은 아들을 돌보고 집으로 돌아오게 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상처와 다툼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떤 화합과 평화의 움직임을 하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혐오와 분노가 가득은 청년 세대를 위해 교회는 어떤 도움과 위로를 주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돈을 아끼고,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 심지어는 생각할 기력도 아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비단 교회의 단위로 나설 것도 없이, 기독교인 개개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너무 개인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만을 버거워하며 마땅히 기독교인으로 나타내야할 모습을 삶에서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로 돕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작은 아들이 가정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입힌 옷과 신, 껴준 반지와, 벌인 잔치와 잡은 송아지를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내놓을 수 있는 큰 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큰 아들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는 제 4의 인물이자 진짜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맏아들된 예수님 자신입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큰 아들도 돌아올 수 있도록, 맏아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넘어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기독교인 답게 살지 못하고 지쳐있을 때 예수님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 세상의 작은 아들들을 위해 나의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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