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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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북
개인은 사회를 이루지만 사회는 개인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 주체적일 순 있겠으나 자유롭지는 못한 것이 바로 사람의 모습이다. 처한 상황에 자신을 적당히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고뇌하며 타협을 해야한다. 원치 않는 곳에 정신을 쏟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하지만, 그 안에서 적당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영화 ‘그린북’은 이런 적적한 분위기가 감도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럼에도 즐겁게 세상을 살아가고자 했던 둘의 이야기다.
영화엔 두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 명은 ‘돈 셜리’라는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예술가다. 그는 백악관에도 초청받고, 카네기홀 위층에 살만큼 대단한 뮤지션이지만, 커다란 시대의 흐름 앞에선 그저 차별 받는 흑인일 뿐 이기도 하다. 또 한 사람이 있으니 ‘토니 발레롱가’라는 이탈리아계 백인이다. 그는 거친 인생을 살아왔고, 소위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겨우 책임지고 있다. 그가 다니던 클럽이 수리에 들어가 생활고에 빠진 토니는 돈 셜리가 운전기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에 면접을 보게 된다. 평소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토니가 이제부터 해야할 일은 8주간 돈 셜리의 로드매니저로서 남부 공연 투어를 책임지는 것이다.
기품 있고 우아한 흑인 예술가와, 괴팍하고 되는대로 살아온 백인이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들은 한시도 자연스러울 날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잠시, 만연하게 퍼져있는 흑인에 대한 경멸을 함께 마주하는 경험으로 토니는 돈 셜리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다. 투어 내내 인종차별적인 사건은 끝나지를 않는다. 바에서 이유없이 백인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저택에서 공연 중 화장실을 요청했지만, 지배인은 저택 화장실이 아닌 야외 푸세식 화장실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돈 셜리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는 30분 거리인 숙소로 돌아가 볼일을 보고, 백인이 잔뜩 기다리는 저택에서 공연을 이어나간다.
차별의 벽을 깨부수려 노력하는 돈 셜리에게도 역시 불완전한 면모가 보인다. 어느 날은 셜리가 남자와 동침을 하려다 경찰에 검거되었는데, 토니는 클럽에서 일했던 그의 기지를 발휘해 경찰들을 잘 구슬리고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때 셜리는 왜 돈으로 이 상황을 해결했느냐고 되려 토니를 나무란다. 또한, 토니가 자신을 구해준 이유는 우정과 연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일감이 없어질 것을 염려한 개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친구 하나 없이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돈 셜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지 모른다.
둘은 투어 내내 언쟁을 하며 서로의 생각을 깨부순다.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는 경관을 폭행하고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위험한 사건이 지나가며 둘은 서로를 쏘아붙인다.
돈 셜리: 솔직히 당신에게 한 말 때문에 때린 거지 난 평생 그런 대접 받았는데 당신은 하룻밤도 못 참아?
토니: 흑인이 아니면 그런 말에 화도 내면 안되나? 당신보단 내가 더 흑인 다울 걸. 당신은 자기네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뭘 먹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사는지.
돈 셜리: 그걸 알면 나보다 더 흑인다운건가?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해요. 말수가 훨씬 줄어들 테니까!
토니: 헛소리! 난 나를 잘 안다고! 평생을 브롱스에서 살았어요. 내 부모님, 형제들, 이젠 아내랑 아이들과 같이! 그게 나라고! 매일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바둥거리는 사람은 나고, 거물 선생님 당신은 성 꼭대기에 살잖아! 부자들 상대로 공연하느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난 거리에서 살고, 당신은 왕좌에 앉아 있지. 당연히 내 세상이 당신보다 더 흑인스럽지.
돈 셜리: 그래 난 성에 살아 토니! 혼자서! 돈 많은 백인이 피아노 치라고 돈을 주지. 문화인 기분 좀 내보려고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 사람들한텐 나도 그냥 깜둥이일 뿐이야.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니까. 그런데 하소연할 곳도 없어. 흑인들도 날 거부하거든. 자신들과 다르다면서!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난 대체 뭐죠?
토니와 돈 셜리는 혼란스럽다. 상대방은 내 결핍의 처방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사회 안에 적응하지 못해 불행해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불안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투어 처음으로 같은 방에서 묵게 될 정도로 친해진다. 토니는 투어 중간중간 편지를 하라는 아내의 말을 따라 무미건조한 편지를 썼지만, 점점 돈 셜리의 감성적이며 사랑스러운 언어로 편지를 가득 채운다. 돈 셜리는 “세상에는 먼저 다가서는 걸 두려워해서 외로운 사람이 많다”는 토니의 말을 듣고, 연락을 끊고 살았던 동생에게 먼저 연락을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투어를 마치고 크리스마스가 다 되어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그들은 인생의 2막을 시작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세상을 관찰해야 하고, 그 안에서 나의 즐거움을 찾아야 하며, 내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 하지만 휩쓸려버릴 듯한 커다란 흐름 안에 있다 보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즐거움은 무엇이었는지 모두 놓칠 때가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의 길을 밝히는 등대같은 존재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 존재는 한 명의 친구가 될 수도 있으며,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세상 안의 내가 더욱 뚜렷해지고, 불안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에게 등대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기도 하다. 나를 꾸밈없이 보여주고, 상대의 불완전한 모습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살면서 행복한 일들이 많아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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