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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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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용준
댓글 0건 조회 3,870회 작성일 21-08-0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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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저-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라는 드라마는 5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5명은 의대 동기이며, 형식적이기만 하고 시끄러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도망쳐 나와 창고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이다. 그들은 40대인 지금까지 같은 병원에서 교수로 지내며 시간만 나면 서로 모여 끼니를 해결하고 담소를 나누곤 하니 그들 사이의 끈끈함은 굳이 형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 다섯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단단한 직업 의식과 직업 윤리를 가지고 있다. 의사면 당연한 거 아니냐 반박할 수 있겠지만 당장 드라마에 나오는 다른 교수들 몇 명 만 봐도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활발한 친구는 외향적 성격을 살려 환자의 신체 뿐 아니라 마음의 치유를 진두지휘하고 조용한 친구는 특유의 배려심과 이타심을 발휘하여 환자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보듬는다. 무언의 집도는 유언의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격한 감동이 찾아올 뿐 이 둘은 모두, 마치 히포크라테스의 환생을 아른거리게 한다.

 

    의사의 목표는 ‘환자를 살리겠다’이 한 가지일 것이며 소설가의 목표 역시 단 한 가지, ‘이 글에 내 영혼을 담아 보이겠다’일 것이다. 하지만 의사들이 하는 외과적 수술과 소설가의 집필은 어째 닮은 면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여기저기 산재한 형상이 있는 물체를 끌어 담아 생명을 살리고, 머릿속을 부유하는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조합하여 내 영혼을 실체화 시킨다는 거의 같은 실제적 프로세스를 가진다. 미세한 생각과 행동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신념과 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의사가 환자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없다면 집도 역시 흐트러질 것이고 소설가가 신체와 내면을 올바르게 정비하지 못해 말하고자 하는 것에 일관성이 없다면 그가 써 내려가는 문장 역시 균형을 잃게 될 것이다. 다만 쓸쓸하게도 이 두 직업에는 하나의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경제적 안정감의 유무일 것이다.

 

    소설가, 문장가 혹인 시인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출간된 책이 흥행하여 인세와 고료만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일부 유명 작가들을 제외한다면 문필을 먹거리로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 한다. 문단에서도 원고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은 양극화되어 유명 문인들의 경우 투고할 곳이 넘치지만, 문인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문인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일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면서, 또한 경제적 궁핍을 각오하는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성공한 문인이다.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왈가왈부하는 것에 이미 지쳤다. 포기하지 마라, 목표를 높게 잡아라 등의 두루뭉술한 조언들은 성공한 자들의 회고가 담겼다기에는 너무 가냘파 보인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회고가 담긴 이 책은 출간된 지 꽤 오래되긴 했지만, 그간 내가 접했던 그의 작품들의 근간이 되는 정서와 신념이 녹아나 있어 읽는 내내 즐거웠다.

 

작업 하나하나에 들인 시간의 퀄리티는 틀림없이 작품의 '납득성'이 되어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역력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단 한 편의 소설로 '소설가'라는 입장권을 받고 무려 3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작품을 써온 그의 창작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누구나 반짝이는 재능으로 소설가라는 칭호를 얻을 순 있지만, 지속해서 양질의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직 소설가는 줄기차게 생산해 내는 작품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며 그것이 자신의 존재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작은 성공으로 소설 외적인 돈벌이와 명예에 현혹되어 자신의 본업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소설가로서 생명은 단축될 수밖에 없다. 소설가가 잡문에 취하거나 외부 강연, 대중매체에 출연하며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일은 치명적이라 그는 말한다. 또한 이 책에서 그는 자신만의 창작의 방법과 과정을 소상히 소개한다.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게 된 경위와 방식은 결국 하루키의 오리지널리티가 되었다. 짧은 문장을 조합하는 리듬감, 번거롭게 완곡하지 않은 솔직한 말투, 자신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적확한 묘사, 모종의 중요한 것이 계속해서 감춰진 듯한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특히 그 문체에 녹아난 리듬감을 그는 재즈의 운율과 가락에서 찾으면서 기본적인 규칙 속에서 자유로운 문장들이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자유분방함과 통일성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문장들은 마치 재즈 카페의 피아노와 색소폰의 조합을 눈으로 듣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데뷔 직전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바를 운영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많은 예술가가 흔히 겪는 창작의 고통, 즉 'Writer’s block'을 느끼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한 욕구만이 그의 유일한 창작의 에너지인 것이다. 그는 소위 '뇌 캐비닛'을 마련해두고 창작의 소재들을 항상 기억하고 비축해 둔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미 머릿속에 그려져 있고 펜을 잡을 때마다 캐비닛에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끌어내어 조합하는 방식으로 거침없이 써 내려간다.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는 고쳐쓰기에 돌입한다.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의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는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매지고 책상에 늘어놓은 열 자루 정도의 연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 

‘자, 이제부터 뭘 써 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을 쓸 수 없어 고생했다는 경험도(고맙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제 생각에는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 쓰는 뜻은 없습니다. 

고역으로 소설을 쓴다는 생각에 저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위의 두 인용 문단을 보면 사실 소설가가 하루키에겐 천직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진다. 그만큼 그는 창작에 진심이고 또 희열 거리다. 우리가 무언가를 업으로 삼고서 그 업이 나의 천직일 확률은 희박하다. 나 또한 어려서부터 해온 것이니 지속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간혹 나를 옥죄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외과 의사들 모두가 천직을 얻었기에 견고한 직업 의식을 가지게 되진 않았을 거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설가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소설을 쓰는 일, 의사가 누구도 답을 장담할 수 없는 수술에 의롭게 뛰어드는 일은 외로운 일이다. 의사와 소설가가 아니라도 대부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홀로 외로운 길 위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을 것이다. 그 우물 밑바닥으로는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고 그 누구도 나에게 ‘오늘 아주 완벽히 잘했어’하고 어깨를 토닥여 주지 않는다. 환자가 기적적으로 살아나거나 소설이 성공한다면 그 결과물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일도 있지만, 그 까지의 과정은 소설가, 의사, 우리가 모두 혼자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 뒤로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난다는 하루키의 말을 가슴에 품자.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쟁취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겠다.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결국 직업에 소중하고 값진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 또한 가슴에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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