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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 언어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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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4,782회 작성일 21-07-0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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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 사전적 의미는 ‘물질의 뜨겁고 찬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물리적인 실체란 찾아볼 수 없는 언어에 온도가 있을 턱은 당연히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언어들로부터 따스함과 차가움을 느끼곤 한다. 때로는 힘들 때 누군가의 말에서 따스함을 느끼고, 무심코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서 냉랭함을 느낀다.


우스운 밤이로구나, 참으로 우스운 밤이야.


밤, 이라는 단어는 얼핏 들으면 차가운 이미지이다. 어둡고, 쓸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갑기 그지없는 온도. 우습다, 라는 표현은 더욱이 그렇다. 우습다, 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웃음이 날 만 하다’로 함축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의 온도, 라는 말이 참 재미있는 이유는, ‘온도’라는 말이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심야식당이나 카페, 바를 운영하는 누군가는, 찾아오는 손님과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면서 따스함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밤’이란 어찌 보면 활력의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은 꽤 늦은 밤이 지나가고 있다. 가장 졸린 시간이기도, 가장 감성적인 시간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가장 작업이 잘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습다, 라는 표현도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그러나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생각나는 따뜻하면서 차가움이 공존하는 우스움일 수도 있다. 오늘도 결국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자조적인 의미의 우스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게는 저 문장이 지금은 너무나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지금 내 소중한 사람이 문학 동아리에 몸담았던 시절 투고했던 글의 첫 문장이라서다. 절대적인 수치, 물리량에 불과했던 온도가 언어에서는 주관적인 성격을 띄게 되는 마법.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유난히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은 마치 언어를 느낄 수 있는 ‘온도’의 이미지를 빌려, 우리가 주변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놓치고 있었던 순간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잔잔한 여운을 선물한다.


나는 키우다, 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책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문장이다. ‘키우다’는 감정과 잘 어울리는 단어인 것 같단다. 어떤 감정은 불에 타오르듯 순식간에 솟아나지만 모든 감정이 그렇지는 않다. 어떤 감정은 시간과 정성을 먹으면서 느릿느릿 자라난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4월 23일

마누라 생일 2월 17일


당신을 만난 때 4월 23일

당신 태어난 날 2월 17일


작가가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 건물에 근무하던 경비원의 수첩을 우연히 들여다봤을 때 본 내용이라고 했다. 평소 이분이 애처가의 면모를 보이기는 했었다. 그런데 왜, 수첩에 유사한 내용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써 놓은 것일까. 어르신이 경비원을 그만두던 날 작가는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진행 속도가 느리지만 치매 판정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당신. 그리고 다른 건 다 잊어도 아내 생일 같은 건 잊지 말자는 생각에 저런 내용을 적어 놓았다고 했다. 하루를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로 받아들이며, 다른 것은 다 잊더라도 아내 생일과 결혼기념일 같은 소중한 것은 잊지 않으려 한다고. 소중한 사람과의 따뜻함은 몇 십년의 세월을 먹으면서 자라나 치매조차 침범하게 둘 수 없는 깊은 뿌리를 박으며 자리를 잡았다.


바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감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혹은 주변에서 미처 놓치고 있었던 순간 안에 숨어 있던 행복함을 꺼내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을 권하고 싶다. 초록이 무성한 이 계절에 마음도 푸르름을 머금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항상 글을 쓰는 작업에서 시작과 함께 가장 힘든 작업인 것 같다. 아, 최근 읽었던 문장 중 가장 따뜻한 온도를 가진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참으로 우스운 밤이로구나. 참으로 우스운 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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