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과 업의 본질,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 이건희
페이지 정보

본문
우리나라 기업의 오너나 CEO는 적게는 수십 억에서 많게는 100억 이상의 보수를 받는다. 지금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삼성전자 권오현 전 회장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정점의 시기에 200억이 넘는 연봉을 받았다. 삼성전자 직원의 평균 연봉이 1억 정도인 것을 감안했을 때, 상당히 높은 금액이다. 혹자는 대기업 CEO들의 연봉 수준이 왜 이렇게 높은지 의문을 제기한다. 대부분의 실무는 직원들이 하는데, 왜 연봉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다 가져가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고백건대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의문은 일전에 회사에서 중역을 맡으셨던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소되었다. 그가 이야기하길, 회사에서 일을 잘 하려면 사원은 엑셀을, 과장은 PPT를, 부장은 워드를 잘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여 임원은 모래시계를 잘 사용해야 한다고 하셨다. 사원은 실무를 보는 사람으로 데이터를 잘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엑셀을 잘 써야하고, 과장은 본인이 한 일을 정리하여 PPT로 설득을 하는 일을, 부장은 제안서를 잘 써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임원이 모래시계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말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그에게 물어보니, 그는 한 기업의 CEO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회장의 부인이 모래시계 세트를 사주었다고 한다. 여러 개의 모래시계는 각각 1분, 2분, 5분, 10분 등 측정하는 시간이 달랐다. 왜 이것을 주었는지 회장이 부인에게 물으니, 임원은 중요한 사안들을 판단하는 자리이니, 판단의 경중을 나눠 중요한 안건에는 많은 시간을 들여 판단하고, 크게 중요하지 않은 판단은 적당한 시간을 들여 판단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즉, 임원이 모래시계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말은 각각의 사안에 경중을 두어 판단을 잘 해야 한다는 의미였고, 이것이 기업의 중역이 가져야 할 핵심 역량이라는 것이다.
기업을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다른 어떠한 실무보다 중요하다. 개별 실무에 대한 가치를 1이라고 한다면, 판단에 대한 가치는 그보다 몇 백 배에서 몇 천 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고려했을 때, 현재 우리나라의 임원이 받는 보상은 그리 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국의 경영자들은 우리나라의 경영진보다 훨씬 높은 보수를 받는데, 이는 모두 노동이 아닌 판단에 대한 보상이다. 그렇기에 기업의 임원들이 일반 직원들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대학원의 연구실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직에서 적용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의사결정이 기업의 흥망성쇄를 결정했던 사례는 지금껏 비일비재하다. 과거에 필름을 만들던 코닥과 후지필름이라는 두 회사가 있었다. 필름카메라가 디지털카메라로 바뀌는 시점에 한 기업은 망했고 한 기업은 흥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코닥은 100년 넘게 필름을 독점하던 회사였고 2위 업체인 후지필름보다 매출액이 1.5배 높았다. 그러나, 코닥은 2000년대 이후 필름 수요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파산하였다. 반면, 후지필름은 필름 수요가 급감하자 필름에서 화장품과 헬스케어 및 의료 비즈니스로 핵심 사업을 전환해 다시 기업을 성장 궤도에 올려놓았다. 코닥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필름 회사였고, 필름의 수요가 감소해서 망했다’라고 이야기하겠지만, 후지필름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화학 회사였는데, 과거에는 수익성이 높은 필름 산업을 하다가 최근에는 수익성이 떨어져서 다른 사업을 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무리 직원들이 열심히 좋은 성능의 필름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회사의 경영자가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면 회사는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 회사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는 항해를 하는 선장과 선원과도 같다. 실제로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선장 아래에 있는 많은 선원들의 수고가 있어서이지만, 실제로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 태풍이나 괴혈병과 같은 위기가 왔을 때 대처하는 것, 모르는 육지가 나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중요한 판단은 모두 선장이 진행한다. 선장의 판단에 모든 선원들의 목숨이 달려있다. 그 배에 아무리 훌륭한 조타수가 있어도 그 배에 선장이 없다면 그 배는 제대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판단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은 옳은 판단에 대해서, ‘의사결정은 잘 못하지만, 리더십은 있다. 저는 그거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리더의 큰 덕목 중 하나는 옳은 의사 결정을 제때 하는 것이 리더십이 출발점이라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훌륭한 리더십은 훌륭한 의사결정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의사결정이 리더의 덕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옳은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량이 필요한가. 이는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故 이건희 회장의 통찰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회장은 항상 ‘업의 본질’을 강조했다. 이에 대한 한 일화가 있다. 1980년에 이건희 회장은 신라호텔의 한 임원에게 호텔 사업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임원은 당연히 ‘서비스업’이라고 답했지만, 이 회장은 답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임원은 고민과 고민 끝에, 호텔 산업의 본질은 부동산업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호텔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호텔은 실제로 입점 위치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갈리고 새로운 시설로 손님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부동산업’이나 ‘장치산업’에 가깝다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통찰이다.
회사의 본질을 통찰하지 못하면 그 회사는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다. 현대백화점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고,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판매한다. 크루즈 회사들은 ‘이동수단’이 아니라 ‘판타지’를 판매한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라. 많은 사람이 일생에 크루즈를 타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비슷한 성능을 가지지만 우리는 왜 브랜드나 명품을 선호하는지. 단지 어떤 제품을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산업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통찰이다.
이외에도 이 회장은, 시계는 패션산업, 백화점은 부동산업, 호텔은 장치산업, 가전은 조립 양산업, 반도체는 시간에서 승부가 나는 시간산업이라는 통찰을 보여줬다. 1993년 모두가 하는 6인치 웨이퍼 공정을 버리고 8인치 웨이퍼 공정을 택하여 세계 1위의 자리를 지금까지 굳건히 지킨 이건희 회장의 의사 결정은 ‘업의 본질’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은 기업의 임원들이 옳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만든 강력한 무기였고, 단숨에 삼성이라는 기업을 전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전자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향상된 데이터 처리와 저장 능력은 인공지능을 발전시켰다. 세상의 많은 반복적인 일들이 인공지능에 대체되고 있으며 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고 있다. 반복적인 일이 안정적인 일이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끊임없는 판단을 해야 하는 일이 더 안정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연구든 업무든 결국 옳은 판단과 옳은 의사 결정을 하는 능력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역량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이건희 회장의 말을 깊게 새길 필요가 있다. 반복적인 업무만 해서는, 그리고 옳은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절대 이 사회를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겠다.
- 이전글메타버스 21.07.01
- 다음글안녕, 소중한 사람 - 정한경 지음. 21.06.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