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 이언 매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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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 이언 매큐언
이규섭
여도지죄(餘桃之罪)의 고사가 있다. 위 영공의 미동(美童)인 미자하가 임금과 산책을 하다가 복숭아를 하나 따서 먹어보고는 맛이 매우 좋아 이를 왕에게 권하였다. 자신이 먹던 과일을 왕에게 건낸 불경함을 두고서 왕은 자신을 사랑함에 먹던 과일이라는 사실마저 잊은 것이라 생각하여 감동하였다. 시간이 흘러 미동은 그 아름다움을 잃고 왕의 총애도 사그라 들었다. 어느 날 미동이 다시 죄를 짓자, 왕은 “네 놈은 과거에도 내게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내게 주었지.”라며 크게 분노하였고 큰 벌을 받았다.
같은 일을 두고도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듯, 같은 상황도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해서, 순간의 기분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쉽게 태도가 바뀌게 된다. 문제의 본질이 미자하에게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벌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서 관계 속에서 미움을 받을 일은 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같은 행동을 두고 고맙게 여길 것인지, 그저 그렇게 여길 것인지, 아니면 서운하게 느낄 것인지는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내 의지로 관계의 향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꽤나 큰 불안감을 가져다 주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도지죄의 사례는 사람들에게 관계 속에서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경각심 만을 남기게 된다. 한비자 역시 "미자하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변한 것은 군주의 마음이다. 예쁠 때는 뭔 짓을 해도 예쁘지만 눈밖에 나면 그 행동이 다 미워지는 법이니 무슨 말을 할 때는 군주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상황 봐 가면서 해야 할 것."이라 했다.
그런 두려움 때문일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계산한다. 무엇이 이득일지, 무엇이 손해일지. 무엇이 위이고 무엇이 아래인지. 이 행동의 결과가 다음에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 이 사람과 가까이 해야 할지, 멀리 해야할지. 그런 소모적인 계산을 반복하는 까닭은 인간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동시에 관계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클라이브와 버논은 주변인들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계속해서 재확인한다. 굳이 좋게 해석한다면 그들이 사회의 상류층에 자리할 수 있었던 데에 이러한 성격이 일조하였을지도 모른다.
“오, 가엾은 몰리.”
몰리와의 관계는 두 사람의 성향과 그 모순적인 행태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모두 한 때 몰리의 연인이었다. 몰리의 장례식에서 둘은 자신이야 말로 몰리의 진짜 모습을 아는 유일한 이해자였다고 생각한다. 결말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몰리의 신랑 조지를 앞에 두고 둘은 그 허황된 확신 하나만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몰리는 좋은 여자였지. 맞아.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진짜’ 모습은 본인만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그 오만함이란.
오늘날 가벼운 관계를 지향하는 현대인들의 겉모습은 인간 관계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내면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른다. 관계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관계의 강도를 낮추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얕은 관계는 그 단순함으로 잠시나마 복잡한 일상에 휴식을 주겠지만, 이는 잠깐의 도피에 불과하다. 약삭빠른 두뇌는 여전히 셈을 하는데 익숙하고, 얕은 관계 속에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행복에 갈증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아무도 그들을, 우리를 비난할 수 없다. 관계가 깊어질 수록 그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는 고통스럽고, 사람은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계에 대한 집착과 의심, 성공을 향한 광기어린 욕구. 현대인의 자화상과 같은 이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다. 성공에 대한 욕심과 어설픈 자존심이 불러낸 오만함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서로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결국 두 친구를 철천지 원수로 만들었다. 그 관계의 끝에는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죽이는 이중살인이라는 처참한 결말뿐이었다.
우리가 완벽하지 못한 만큼, 우리 주변의 타인들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미완의 존재들이 얽히고설키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긋남 들에 상처 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미움과 증오가 옮겨가는 속도 보다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생겨나는 진솔한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마음의 강인함이 삶의 강인함으로. 삶의 강인함이 관계의 굳건함으로 조금씩 나누어지도록.
동시에 이는 누군가에게 권유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과 원망은 가벼이 흘려넘기고, 다른 이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서 볼 수 있듯, 우리 사회의 체계는 이러한 방향으로 변화를 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를 억제한다. 어디서든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미 탁해진 물을 보고 너도나도 미꾸라지가 되기를 결심하는 세상이다. 탁해진 물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더러워진다고 청소를 안할 것인가. 어차피 배가 고파진다고 밥을 먹지 않을 것인가. 사람 사이의 관계. 그 관계의 종식이 오지 않도록, 사회가 아사(餓死)하지 않도록 누군가 밑지는 일을 해야만 한다. 조금 손해보는 것 정도는 버틸 수 있는 강한 사람들로 충만한 사회가 되기를. 그러기 위해 오늘 하루,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어제보다 좀 더 관대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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