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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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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514회 작성일 21-05-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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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 작자 미상

(La vida de Lazarillo de Tormes y de sus fortunas y adversidades)

 

이규섭

 

 오래된 이야기를 읽을 때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이내 여러 복잡한 생각으로 확장된다. ‘사람 생각하는게 다 거기거 거기구나. 세상 일이란게 다 그런 법이구나’ 하는 심심한 위로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이란게 어떤 범위 내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뿐인 건 아닌지 하는 아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은 스페인의 고전 소설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시초가 된 작품이라는 문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나름 기념비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은 16세기 스페인을 살아가는 하위 계층의 삶을 라사리요라는 인물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는 언제나 현실의 치부마저 날것 그대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소설은 라사리요라는 인물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 익살스러운 표현으로 빈부격차, 계급 사회의 모순, 종교인들의 부패 등 당시 스페인 사회 전역에 만연한 부조리를 폭로한다.

라사리요는 어린 시절 집을 나서면서 여러 주인을 모시게 되지만, 그 중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소설은 여러 주인들과 보내면서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라사리요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들과 이별하는 과정을 그린다. 때로는 라사리요 본인이 주인들 못지 않게 악랄한 방법으로 그들을 골려주기도 한다. 라사리요가 섬긴 주인들은 하나같이 탐욕의 덩어리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데 있어 한치의 거리낌이 없는 악인들이다. 동시에 남들 앞에서는 고결한 척 행동하며 자신의 악행을 숨기거나, 다른 정당한 명분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소설은 “단순히 있는 자가 악하고 없는 자는 선하다”와 권선징악으로 대변되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주제를 담은 옛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라사리요 본인 조차 제대로 된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삶 내내 그를 괴롭히는 ‘배고픔’은 그를 자꾸만 미움, 폭력, 거짓말, 도둑질과 같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생존 욕구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옳지 못한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때로는 그 사실이 그릇된 행위를 정당화할 변명이 된다. 이런 보편적이고 소시민적인 삶의 형태는 오늘날 까지도 이어진다.

이 즈음에서 부제의 의미를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삶이 행운과 불운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음에도 라사리요의 삶을 ‘운’을 기준으로 나눈 까닭은 무엇일까? 돌이켜 보면 라사리요가 살아가는데 있어 그가 바라는 바를 스스로 정한 바가 있던가? 첫째 주인인 장님의 가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뒤, 두 번째 주인인 신부가 이전 주인보다 더 악독하다는 사실에 그는 좌절하고 만다. 삶 속의 많은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주인이 계속 바뀔 때마다, 분명 전 보다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이곳을 떠난 뒤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삶이 기다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불안해 한다. 한편, 그의 긴 고난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였던 것에 비하여, 마침내 그의 삶이 배고픔이라는 일차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게 묘사된다. 갖은 고생을 하던 라사리요가 어찌어찌(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괜찮은 일거리를 찾아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름 살아갈 방도를 구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그러니 그의 모든 슬픔과 아픔도, 모든 기쁨과 쾌락도 다 운에 따랐던 것이지 그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결국 부제의 ‘운’이라는 표현은 소시민의 무기력함을 넌지시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게 아닐까?

스페인 소설답게, 부조리한 현실이 라사리요의 눈에 담길 때마다 그는 이를 더 익살스럽게 표현하며 웃어넘긴다. 허나, 이것이 단순한 풍자에 머물지 않는 것은 라사리요가 끔찍한 현실에 순응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엉망진창인 현실의 모습에 순응해버리는 그 모습이야 말로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첫째 주인인 장님의 학대에 가까운 폭력에 이를 그대도 되갚아주고 도망치거나, 둘째 주인인 신부의 인색함 앞에서도 어떻게든 먹을 것을 뜯어내기 위한 기싸움을 벌이던 그였다. 그는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최소한의 무언가, 배고픔이라도 채워줄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사였다. 비록 그것이 배고픔에서 기인한 생존 본능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생존 본능에서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그의 투쟁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단순히 배가 부르고 난 뒤에 과거를 잊은 인간의 전형으로 취급하기엔 무리가 있다.

어쩌면 라사리요는 자신의 삶이 소시민의 삶에 불과함을 진즉에 깨달았고, 자신의 의지 보다는 운에 의해 대부분의 것이 결정되어버리고 마는 현실에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 번의 행운으로 찾아온 안정적인 상황에 감사하고(또한 신에게 감사하고) 그의 눈에 담겼던 수많은 부조리를 외면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배움이 적고 어리석으며 갖은 고초에 지친 그가 내릴 수 있는 혹은 그의 본능이 선택한 최선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종장에서 이러한 그의 모습이 명확히 드러난다. 마침내 포고 담당이라는 공무원 직을 얻게 된 라사리요는 교구 수석사제가 그의 하녀를 소개해주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맞이했다. 그런데 점차 주변인들로부터 수석사제와 아내가 외도를 저지른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라사리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를 단호히 부정한다. 허나 이는 아내에 대한 굳은 신뢰가 아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소문이 점점 불어나자 수석사제는 뻔뻔하게도 직접 삼자 대면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그의 부인은 조신한 사람이며, 결코 자신과 부정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번에도 라사리요는 사실 관계를 확인할 생각도 않고, 이에 격하게 동의한다. 친구들이 말하길 아내가 혼전에 아이를 세번이나 낳았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이를 믿지 않는다고 굳이 설명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이 말에 아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모든 소문이 사실임을 시인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어르고 달래에 셋 사이에서 원만한 합의를 본다. 이후 주변인들이 이야기를 꺼내면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과 함께 단호히 일축한다. 라사리요는 사회의 부조리를 견디다 너무나 약해져서, 어쩌면 온갖 고초를 겪는 동안 이 부조리한 세상 앞에서 자신이 한 없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서 모든 것에 순응하고, 그나마 자신이 얻은 작은 행복을 지키고자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거짓 행복을 지켜낸 그 해를 자신 인생의 최고 해였다면서 회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는 것이다.

누군가 슬픈 이야기를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가 이제 허탈하게 웃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라사리요의 익살스러운 회고를 듣고 난 뒤, 운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무력함에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의 삶 구석구석 보이는 풍경이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는 동일하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슬퍼졌다. 이 소설의 사실적 묘사가 그 시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회가 돌보지 못하는 삶 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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