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지, 내 아이에게.
페이지 정보

본문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래, 학교 문을 나선 열일곱의 여름날……. 까마득하구나. 벌써 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말이야. 7월의 눈부신 여름이었어. 모든 생명이 푸름에 잠겨 가만히 햇살을 만끽하고 있던 날. 세상이 마치 흰색의 거대한 캔버스 같았지. 난생처음 느껴보는 오롯한 설렘이었어. 교정 너머의 풍경이 낯설게 보이고, 이제는 정말 홀로 모든 붓질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슴이 벅차올랐단다. - 본문 中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책의 한 켠에서 그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더랬다. 인생이란, 한 장의 도화지와 같다고. 그것을 정형화된 무언가로 채우든, 자유로운 추상화를 그려 나가든,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몫이고 그 책임도 역시 그렇다고.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할지 못할 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그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 <이탈한 자가 문득> 中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아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마음 따뜻한 에세이 <내 아이에게>의 저자, 하은지님을 수식하는 타이틀은 다양하다. 작곡가 하은지, 작가 하은지, 크리스천 하은지. 그리고 ‘자퇴생’ 하은지. 여기서 자퇴란 대학교가 아닌, 고등학교 자퇴이다. 작곡가의 꿈을 안고 있었지만 그저 성적으로 점철된 경쟁으로 가득찬, 알맹이 없는 고등학교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과감하게 자퇴를 결정하고 작곡 독학을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피아노 앞에 살면서. 고교 시절, 나름 ‘모범생’ 타이틀을 달고 다녔던 나로서는, 당시 하은지 작곡가님의 고뇌와 갈등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감히 학교라는 태양을 따라 공전하는 궤도를 이탈할 생각조차 못했던, 아니, 그럴 이유조차 없었고 용기도 없었던 나는, 과감하게 이탈해야만 했던 자의 자유와 책임감을 짐작할 수 없다.
철저히 약육강식인 체제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진실한 이해와 사랑의 교감일지도 모른다. 경쟁과 위선과 허영의 말 따위가 아닌 낮고 겸손한 언어들일지도 몰라. 사실 모두가, 겉으론 보이지 않는 공허의 바닷속을 허덕이고 있으니까.
- 본문 中
내 세대도 그랬고, 요새 학생들은 어울려 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 경쟁을 먼저 배운다. 시를 배우기 이전에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점수를 높이는 방법을 연마한다. 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심화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각종 혜택과 편애를 주는 데에 익숙하다. 내가 한창 학원 강사를 할 때에는 심지어, 여학교에서조차 이과와 문과의 비율이 1:1이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이공계쪽으로 머리가 안된다는 편견이 깨져가는 건가 하고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취업난 때문에 취업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억지로 이과를 택하는 학생들이 늘어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약육강식 체제에서 사람은, 그저 이기고 짓밟을 대상일 뿐이다. 잠재적 경쟁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음악은 음역의 높낮이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함은, 결국 그 자신의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무한경쟁 체제의 학교에서는 도저히 길러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녀, 하은지 작곡가님은 결국 궤도를 벗어나는 길을 택했다. 그 이래로 그녀는 매 분 매 초를 스스로 설계해 나갔다. 형편상 예체능 과외를 받을 수 없었던 그녀는, 교회의 연습실과 인터넷을 통해 작곡과 피아노를 계속해서 연습해 나갔다. 엄청나게 넓은 흰 도화지가 주어진 만큼, 그것에 대한 압박감을 묵묵히 견디는 것 또한 그녀의 몫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느꼈던 심정을 바탕으로 미래의 자신의 아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미리 에세이로 남겼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때를 준비해나가는 것은 온전히 네 몫이라는 걸. 감사와 원망, 행복과 불행은 겨우 한 끗 차이며, 그 결정권은 언제나 네 손에 있다는 걸. 눈에 보이는 수치와 숫자로, 그리고 타인의 시선과 때때로의 뭇매로 네 자존감에 값을 매기는 일은 되도록 피하렴.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고, 또 감정할 수 없는 보물은 이미 네 안에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야.
- 본문 中
어떻게 보면 나는, 한국의 학생으로서 매우 정형화되고 ‘모범적인’ 코스를 밟아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만약 미래의 내 아이가 이 분처럼 자신의 꿈을 위해서 학교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과연 나는 그것을 기꺼이 들어줄 수 있을까. 아이를 온전히 믿어줄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내 좁은 심적 여유에서 그것을 허락할 수 있으려면, 정작 아이가 결국 실패의 고배를 맛보더라도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자문해본다.
항상 내가 입버릇처럼 담는 말. 미래의 내 아내와 아이에게는 살살 살아도 되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말. 성경 말씀에 그런 내용이 있다. 달란트(능력)를 몇 개를 가지고 있든지, 그것에 맞게끔 살면 그 분께서는 그걸로 족하고 기뻐하신다고. 오히려 자신의 달란트에 불평하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그분을 슬프게 만드는 일이라고. 현대 사회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 미래의 내 아이야, 어딘가에 태어날 예정이라면, 자신의 달란트에 충실하고 부디,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나 역시 부모로서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구나.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서로 준비가 되어있기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