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 '시적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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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책을 펼치기를 꺼려했던 나는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 나서부터 대학생이 읽어야 할 인문학 40선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중이다. 많고 많은 종류의 문학 중에서 인문학 도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유별나지 않다. 그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재미” 딱 그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인지 어느 순간부터 대학생이 읽어야할 인문학 40선이나, 철학서에 대해 피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간까지 읽은 책을 끝까지 읽기 지루할 뿐 아니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의 차이점은 알겠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고 점점 글들이 난해지니 궁금해서, 호기심에 의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결론이 ‘아, 뭐라는 거지?’로 도달한다. 내가 익히고 있는 전공이 실험의 결과 그 사실에 기반한 분석으로 정해져 있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나에게 인문학은 어색하다.
이번에 집어든 ‘시적 정의’는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공적인 좋은 삶을 만드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나는 디킨스의 작품을 알지 못할 뿐더러 리처드 라이트, 월트 휘트먼 등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 작가들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일전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와 같이 가독성이 좋은 글이라는 느낌도 아니다. 이해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받은 느낌은 이 작품은 정의를 찾아 가는 느낌이다.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찾아 가지만 기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현상 세계에서 찾아 가려하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어려운 글이라 말을 꺼내기 어렵지만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짧게 이야기 하자면 법을 공상이라는 부드러운 빛을 통해 다루어야 한다는 이야기, 인물에 대하여 무, 유죄를 나누는데 있어서 인물의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지이다. 문학적 상상력이 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고 입법자들이 법을 제정하는 공적 상상력에 적용되기는 쉽지 않지만, 문학의 형식이 개인의 삶과 사적인 상상력을 통해 고유한 방식으로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책 말미에 나오는 ‘소수의견’들이 갖는 중요성이랑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공상이 공리적 판단을 야기 할 수 있으며, 이는 과학적인 방법에 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서 애덤 스미스의 분별력이 있는 관찰자에 대한 관념을 차용하여 공감,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합리적 감정, 믿을 수 있는 지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 관찰자라는 것에 대하여 참 역설적이지만 재밌는 이야기를 한다. 믿을 수 있는 감정의 조건에는 첫째로 참된 근거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건의 당사자들에 의해 인지되는 속성을 담고 있다. 둘째로 감정은 사건의 연루되지 않은 관찰자에 의한 것 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관점들을 다루고 있지만 문학적 공감, 공감에 대한 과학적이란 관점에 대한 이야기와 앞서 언급한 관찰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우선 작가는 “우리 자신의 삶이 아닌 것을 통해 얻어진 정보는 관심 있는 참여자들의 개인적 편향성을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정말 의문이 들진 않을 수 없는 주장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 우리는 이미 편향성을 띤 정보를 제공 받는 적이 정말 많다. 물론 이런 편향성을 띤 정보를 혹은 생각이이 한 쪽으로 기울어 진 것이라는 것을 본인이 인식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물론 작가가 말한 것처럼 도덕적 문학적 공감이 항상 이루어진다면 가능 할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미지수 같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게 녹녹치 않아 보인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와 생각을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통해 제공 받는다. 모든 정보와 상황을 분별력 있게 볼 수 있는가 라는 의문과 그렇게 굳이 이렇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의라는 것 자체가 규정하기 참 어렵고 까다롭다고 생각해서 일까 나는 정의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정의라는 것은 개인적 정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몫 없는 자들과 억압받는 집단들에 공감하고 동일시하려는 문학적 경험을 모색함으로써 이러한 문학적 이해를 확장시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라는 말에 대하여는 공감하는 바이다. 소수에 대한 이해, 공감은 중요하며 점점 사회가 개인화 될수록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힘이 될 것 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관성 있게도 마사 누스바움의 작년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 저자의 인터뷰 중에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누리는 삶의 기본을 보장 받는다면 세상의 두려움은 줄어들 겁니다. 두려움이 줄면 혐오도 줄어들죠, 우리 자신이 취약할 때 다른 집단에게 그 탓을 돌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기거든요.”와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부가적인 정의를 시적 정의로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그럼 적어도 지금보단 낭만 있는 사회가 되어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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