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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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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용준
댓글 0건 조회 5,413회 작성일 21-03-0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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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히가시노 게이고 저

 


   생각이 많을 때는 다른 곳에 잠깐이라도 집중하고 싶어진다. 평소엔 잘 읽지 않는 소설도 이럴 땐 술술 잘 읽힌다. 신작 목록을 훑던 중 반가운 이름을 보고 홀린 듯 클릭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나는 그를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알게 되었다. 그가 문단에 이름을 올린 지 약 20년이나 지난 후에 내가 그를 알게 된 셈이니 나는 제법 책과는 담 쌓고 지냈던 듯하다. 아무튼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통한다. 그는 특히 추리 소설에서 타고난 재능을 보인다. 아마 대부분 사람은 추리 소설을 읽을 때 본인들의 예상 범위를 보란 듯이 깨뜨리는 결말에서 통쾌함 내지는 뒤통수가 얼얼한 재미를 느끼고 싶어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에게는 추리 소설 본래 의미로부터 파생되는 이른바 쫄깃함이 주된 흥밋거리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생생한 인간미를 즐긴다. 인물이 보이는 행동이나 내뱉는 말을 수도 없이 읽으며 내가 그 자리에 있음을 상상해본다. 그리고는 추리보다는 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하곤 한다. 내가 추리 소설 초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진정 즐길 줄 아는 단계에 도달한 것일까?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

 

   추리 소설의 존재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바로 '추리'에 대한 수요일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살인 사건이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하게 구성되어 있는가, 얼마나 감탄을 자아내게 할 수 있는가, 독자들의 예측 범위를 얼마나 벗어났는가 등이 주요하겠다. 그렇기에 추리 소설 마니아들은 사람들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기보다는 잘 직조된 사건에 구성에 열광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특징을 가지는 소설들을 더 높게 평가한다. 사실 추리 소설에서 문학적 내지는 인문학적 의미를 끄집어내어 논할 필요가 딱히 없긴 하니 말이다. 그저 충실하게,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결말을 읽고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추리를 내보이면 된다. 넓은 추리 소설의 바다에 나 홀로 풍덩 빠진 듯한 기분이 들 때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번역가 윤성원의 예전 글을 찾아 읽고 동지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분명 추리 소설인데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것인가?

어떨 때는 서글프다 못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는 미스터리 작가지만 기교보다는 인간을, 사건보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작가라는 것을. 

사건에 빠져들어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지만 결국 내가 이른 곳은 사람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그는 단순히 수수께끼 풀기에 골몰하지만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건 주변의 인물이 보이는 다양하고도 놀랍도록 솔직한 인간상과 욕망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그는 문학이 추구해야 할 요소들을 표현하는데 그 도구로써 추리 소설을 택한 듯한 기분이 든다.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역시 한 남자의 절절하지만 조금은 왜곡된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추리는 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그 자체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추리적 재미를 토대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한껏 발휘한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낸 소설이라면 독자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무겁거나 사회적이지도, 그렇다고 또 너무 가볍거나 사건, 트릭 위주도 아닌 그 경계에서 자유자재로 줄타기를 하는 소설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그의 인기가 이해가 갈 정도다.

 

   일단 오랜만에 읽은 히가시노의 작품은 퍽 마음에 들었다. 여태껏 오래도 지속 중인 코로나19를 작품에 담은 것은 물론, 작금의 사태가 적절 하게 내용에 녹아 있다는 점 또한 만족스러웠다. 유행을 빠르게 적용하는 다작의 작가답달까. 이 작품 역시도 나는 추리보다는 인물에 조금 더 집중했다. 일상과 같이 잔잔하고 조용히 흘러가는 과정 속, 지루하지 않도록 하는 마치 간이 딱 알맞은 음식에 들어간 소스 정도의 역할로 추리가 선택됐다. 아버지의 죽음에도 의연한 반응을 보이는 주인공의 미묘한 담담함이 있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면서 얼떨결에 갖게 된 과분할 만큼의 여유 시간에서 평소 걱정거리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차분함이 있었으며, 오랜 친구와의 갈등을 원활하게 해결하려는 따뜻한 현명함이 있었다. 미묘한 전개 속에서도, 전직 마술사 삼촌의 뛰어난 통찰력은 마치 굳게 닫힌 문 들로 가득한 방으로 열쇠를 던져주는 듯 시원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마술사가 갖는 마술사만의 치밀하고도 재밌는, 그렇지만 쇼의 비밀을 알려주진 않듯 조금은 불친절할 수 있는 삼촌만의 방식으로 살인 사건을 포함한 주인공의 일상 문제들이 차근차근 해결되는 것이 내용의 이 작품의 주된 요소였다.

 

   사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떡 하니 추천하기는 조금 힘든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작금의 사태에 놓인 지금의 나와 너무나 유사한 주인공이 다신 없을 다양한 상황들 속에 갑작스럽게 놓여 그 모든 문제를 재치 있게, 현명하게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작품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히가시노는 이 작품을 통해 주인공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저자는 주인공이 겪는 문제들에 전직 마술사 삼촌, 전통주 가게를 창업한 옛 친구 등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 시켜 풀어나갔다. 생각이 많아 가볍게 읽으려 했지만,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져 버린 것만 같다. 작품에서의 새로운 인물에 해당하는 나만의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정말로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 삶에 활력을 불어올 수 있다면 나에겐 다시 여자친구가 필요해진 걸까. 아니면 앞자리가 바뀐 내 나이에 비해 여전히 무책임한 인생 계획에 슬퍼진 걸까. 생각이 더 많아진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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