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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이 된 미술관 – 니콜레 체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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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263회 작성일 21-03-03 23:50

본문

동물원이 된 미술관 – 니콜레 체프터

이규섭

 

리처드 오스본의 [미술사 아는 척 하기]를 통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볼 계기를 마련했다면, 이번에는 다시금 반대의 방향에서 미술을 바라보기로 했다. 지난 교훈은 결국 작품을 이해하려면 시대적 맥락의 연장선 상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해석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미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보면, 다시금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미술사의 흐름을 슬쩍 훑어 본 뒤에도 현대 미술은 여전히 난해하다. 미술사에 편입된 녀석들이야 여러 평론가들과 역사가들이 그 의의를 하나하나 풀이해 주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무 물건이나 가져다 놓은 것 뿐인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들은 이제와 그 맥락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여전히 찝찝한 기분은 남기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뒤샹도 어느덧 70~80년 전의 작가다. 심심할 만하면 뉴스에 나와 최고가를 경신했다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어떤가? 작품이 제 역할을 하고 나면 이 역시 누군가의 세계를 한 층 확장 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다다를 만한 친절한 설명을 제공받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이루어진 회화들의 가치를 헤아리는 것이 슬슬 난감해 지기 시작한다. 이제 좀 더 내려와보자. 가끔 홍보 포스터를 볼 수 있는, 소규모 전시회 들이 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 유명하지 않은 작가, 우리가 아는 어떤 미술 관련 지식과의 연결고리도 만들기 어려운 작가들의 전시회에서 우리는 발가벗겨진다. 우리는 그들의 미술을 평가할 수 없다. 그 형태는 하필 난해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엄숙한 전시관의 분위기, 하얀 방, 계획된 배치. 그리고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와 사이에 그어진 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면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짤막하게나마 작품 설명을 해줄 도슨트가 있다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이니, ‘줄 하나 그어 놓고 몇 억 버는게 미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허울 뿐이고 어려운 용어로 빈약함을 꽁꽁 감춘 속 빈 강정이다.

 

… 관람객은 설명을 읽는다. “이 추상물의 내부에는 메마른 풍경이 만개하고 있고, 명백한 구두법이 알레고리적인 지시관계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권력, 소외되고 정서적으로 분리된 유년기, 정신분석, 꿈,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에리히 프롬, 테오도어 아도르노)은 물론, 섬뜩하면서 으스스한 무언가를 암시하고있다.” 그런다음 관람객은 분명 이 언어의 껍데기 이면에 자리 잡은 내용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을 것이다.

… 이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은 비디오 작품을 보며 자신만의 언어도 어떤 언어도, 아울러 이 전시회의 기본아이디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 전시회에서 작성한 텍스트는 극찬으로 오염되어 있다. 이런 찬사는 웃기지도 않고 차마 내용이 텅 비었다고 비판할 거리도 못된다.

-      본문 중에서

 

 

시장 경제 속의 미술

이전 독서를 통해 깨달은 것은 미술을 해석하는 미술사적 가치, 미술로써의(미학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모를 때에도 내게는 미술을 해석하는 가치가 있었다. 바로 시장에서의 가치다. 그리고 이는 대중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가치다. 유명하면 돈이 된다. 그리고 돈이 되면 유명해진다. 돈은 희소한 가치를 지닌 것에 몰린다. 그러면 미술은 희소해져야 한다. 희소해지는데 집중하면 그것은 상업적이 된다. 상업적이 된 모든 것들은 상업적이지 않은 가치를 전혀 포함할 수 없다. 미술은 분명 상업적인 형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미술사를 돌아보았을 때, 미술은 철학의 영역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본문에 소개된 내용에서 철학자 게오르크 버트람의 저서 <미술 : 철학적 입문> 에 따르면 미술은 항상 이론이 분분하다. 결코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미술은 미술에 대해 항상 숙고한다. 게오르크 버트람은 미술을 책상과 비교한다. 우리가 책상을 볼 때에, 다른 설명 없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지만, 미술 작품은 단순히 형태를 통해서 간단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미술은 체험되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미술이라는 이름의 철학이다. 이는 시장경제와 양립할 수 없는 가치다. 허나 시장은 돈이 되는 것에만 몰린다. 부익부 빈익빈이고, 승자독식이다. 시스템의 개입이 없으면 다른 가치와 시도를 위한 자리는 없다.

 

… 그래서 오늘날 미술가 역시 비평을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장에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는 형태로 나오는 미술가의 아이디어는 아마도 신성모독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누구든지 그런 종류의 집단적인 혐오에 대해 의견이 일치될 수 있다. 그런데 단지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어떤 생각을 쥐어짜는 형태로 나온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러니까 미술이 그저 미술가 자신을 선전하는 광고로 기능할 뿐이라면, 그들의 진짜 캐릭터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일까? 지금은 스타를 숭배하는 시대이고 미술가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절망에 빠져 있다. 나는 이 작품으로 어떤 존재가 될까? 도대체 나는 누군가가 되기는 하는 걸까? 불안과 근심이 엄청나게 만연하는 상황에서 진솔한 것은 나올 수 없다. 미술도 그렇고 비평도 마찬가지다.

-      본문 중에서

 

관객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 받지 못했고, 미술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리그는 시장 논리에 지배되어 있다. 전시회도 그렇다. 유명한 작가, 비싼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우리가 아는 건 그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스템은 또 다른 유명한 작가와 비싼 작품을 만든다. 이제 작품이 비싸서 작가가 유명한 것인지, 작가가 유명해서 작품이 비싼 것인지 모른다. 미술은 대중음악과 다르게 관객은 그저 전시회에 가는 것 말고 할 수 있는게 없다. 소수의 전시가들과 컬렉터들이 시장을 주도한다. 이런 모순속에서 나온 결과물이 모순적이지 않은게 이상하다. 미술은 원래 꽤나 주관적이다. 그래야 한다. 그런 와중에 그 평가의 잣대가 더욱 불분명 해져버리고 만 것이다. 많은 작품들이 실제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그저 선 하나만 그어놓은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말해도 이제는 그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잘못 만은 아닌

미술은 몰입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감탄하고 감동할 수 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이들이 여전히 미술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러나 어째서 여전히 우리에게 미술이 친숙하지 않고, 어렵게만 느껴지는가? 오만 작품들의 사진을 쉽게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래서 익숙해진 걸까? 미술을 통해 감탄을 하게 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품’을 마주한 감동이 아닌 미술이 주는 감동 말이다. 우리가 미술로부터 회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 수많은 모순적인 요인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다.

 

… 미술은 세상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신화를 먹고 살아가지만 오늘날에는 기껏해야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영리 행위의 일부일 뿐이다. 주류를 위해 홍보라는 유연제로 헹군 이벤트일 뿐이다. 이러한 신화로 인해 요구와 현실이 대립구도를 이루지 못하는 미술세계가 만들어진다. 유명 미술가와 명작이 만연한 세계, 미술작품이 교육의 도구로 계속 남용되는 세계, 미술을 누구나 호감을 느끼고 알아보는 세계, 미술 행위자가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 아울러 조형예술에 대한 정보를 과장된 찬사의 언어와 미사여구와 상투어로 즐겨 조합하는 세계, 작품보다는 여기에 수반한 텍스트의 필자를 훨씬 두드러지게 띄우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인간에 대한 관심사” 같은 거대한 개념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관람객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      본문 중에서

 

<동물원이 된 미술관>은 본문 속에서 이러한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현대 미술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대답을 “미술 증오”의 형태로 내놓은 이 신랄한 비평문은 미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자리한 구태의연함과 불필요한 위계, 시장논리를 비판한다.

우리가 여전히 미술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미술과 미술 전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잠식된 미술 경영과 그 안에서 변질된 미술가 들에게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종종 동시대 미술에 대해 투덜대기는 하지만, 미술관에서 한참 밖에서 떠드는 이야기는 결코 반영되지 않는다. 전시회는 우리에게 친절하지 못하고, 미술을 이해하기 보다 그들이 원하는 수동적인 청자로 만드는데 힘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성한 무언가 앞에서 우리는 매너 있게 행동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미술 다운 것인 것 모르겠다.

 

…관람객은 정통 문화라는 거룩한 우주를 마주하고는 주눅이 든다. 아주 괴로운 느낌이 들며, 결국 이러한 감정은 미술관을 멀리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한다. …

…관람객에게 전시회에 대한 견해를 물어볼 때 자주 듣는 말은 다음과 같다. “저는 문외한입니다. 답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전시회를 평가해달라고 요구 받을 때, 자신의 본색이 몽땅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얼마나 자주 느낄까? 여기서 엘리트 적인 전시회 문화라는 필연적인 결과는 예외로 둔다.

-      본문 중에서

 

예술(art)은 고달픈 일 이라고들 한다. 그런 정상 참작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 대한 경외심 때문인지 우리는 예술에 관대하다. 우리의 밥그릇과 상관 없는 이야기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달이 역으로 예술의 포화를 불러온 듯하다. 예술가는 세상에 그득하고, 디지털화는 예술의 공급을 무한대로 증식시킨다. 예술이 밥먹여 주냐고들 말하지만, 예술로 밥벌어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부기지수인 것 같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자유인지, 세속적 자유인지 궁금하다. 예술이 다른 여러가지 것들처럼 남들이 안한 걸 선점하는 땅따먹기로만 보인다. 그런 현실의 기반에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존중 하에 퇴화해버린 미술 시스템이 있지 않을까? 저자는 비판의 필요성을 부르짖으며 미술 증오를 외친다.

 

진정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기에 남들과 다르게 쓴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 이는 자기 만족이나 감정의 표출을 위해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과의 말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야.”라는 구질구질한 부연 설명을 곁들이지 않아도, 말에서 전해지는 애정의 깊이가 그 둘을 확연히 구분 짓는다. 그러니 미술관람객과 미술 전시가, 큐레이터, 직원, 수집가, 미술가와 같은 모든 관련인들을 향한 증오, 미술을 향한 증오를 부르짖는 글 속에서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 가득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닐 것이다.

 

미술을 사랑하는 이는 미술을 증오해도 된다. 나머지 다른 것은 거짓이고 허위다. 그런데 이런 거짓 이야말로 미술 경영을 결집시키는 수단이다.

  …

미술 증오는 미술 분야에서도 사랑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것이 바로 실망 때문에 시작한 이 책이 간절하게 바라는 소망이다. 미술은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촉매 역할을 한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미술은 이를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다.

…

미술은 솔직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솔직하지 못하다. 미술 증오는 솔직함에 접근하는 행위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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