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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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맥스웰이 제안한 ‘도깨비 사고 실험 내용’을 요약하자면 두 종류의 기체가 가득 차있는 방이 있고 중간에 문이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그 사이에 악마가 있어 떠돌아다니는 입자를 선별적으로 방 한쪽으로 보내며, 이 과정에서 악마가 문을 여닫을 때 일의 소모가 없는 것과 함께 이 악마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함께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게 되면 두 방의 기체는 완전히 분리되고 그 계의 전체 엔트로피가 감소하게 된다. 하지만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내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개념과는 다른 느낌의 책이었다. 우선 ‘제레미 리프킨’은 사회학자였고 물리학적 엔트로피 관점에서의 해석보다는 물리학에서 정의한 엔트로피의 개념을 빌려와 사회현상을 설명하고자 한 사회과학 책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무분별한 발전이 결국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드려지는 시대이지만 저자가 이 책을 처음 썼을 시대는 1990년대라는 점(당시 무분별한 발전에 대하여 물리학의 관점에서 문재제기를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회학적 접근이 어처구니없지만은 않았다. 엄밀함을 중요시 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충분히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전개이나 과학의 대중화에 있어서 이런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물리학적 정의의 사회적 해석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자주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저자는 우선 ‘세계관을 정의함’이 필요하다고 글을 시작한다. 제 1부에서는 그리스에서, 기독교적, 현대의, 베이컨의 기계적 세계관에 대하여 소개 한다. 제 2부 물리학적 엔트로피를 잘 설명하며 이를 시간, 우주, 생명, 외부적 도구의 에너지에 적용해 보았고, 3부 부터 5부까지 사회적, 세계적, 역사적, 철학적, 산업적 틀에서 발전은 엔트로피가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며 자신의 주장에 당위성을 확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 엔트로피 증가에 대하여 운명론적 입장을 취하며, 우리는 저에너지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증가는 결국 에너지를 오염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입장의 저자의 주요 내용일 것이다. 인류가 발전은 거듭해 나아갈수록 엔트로피의 분수령에 향해 간다. 우리의 생활에 전기, 혹은 에너지의 사용이 더 많아 질수록 그것의 변환 과정은 복잡해지고 이런 과정 속에서 무용한 에너지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엔트로피의 중가를 물리학적 에너지의 측면에서 뿐 아닌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흐름들 ‘사회적 현상’, ‘생산성’, ‘교육’, ‘매스컴’등에서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발전을 거듭할수록 에너지를 포함한 인간의 활동들이 통제하기 어렵고 난해해 진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현상에서 난해하고 까다로워져 무질서에 가까워진다면, 1장에서 소개된 많은 세계관들처럼 몰락할 것이고 인류의 몰락은 자명해 보인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필연적이여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대처를 해야 할까. 저자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계속 희망을 건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절망뿐이라는 주장을 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패러다임에 관하여 위험성을 경고 하며, 세계의 유한성을 시인할 줄 알아야만 지구라는 불리는 이 선물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며 지배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 인간이 만들 세계가 아닌 인간을 만들어준 세계에 적응하는 길 뿐이라며, ‘우리는 이 세계의 시종꾼’이라는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다시 말하자면 ‘엔트로피의 증가로 인류뿐 아니라 지구라는 세계는 멸망한다. 우리의 발전은 멸망을 앞당기고 있으니 각성하고 저 에너지 시대 즉 엔트로피의 증가를 줄이는 방법으로 적응 하여 살자.’ 라는 다소 운명론적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저자의 주장에 일부분은 동의한다. 우리는 각성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인류는 찬란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우리의 찬란함은 결국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고 있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자멸을 재촉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한 문제를 봉착했을 때 터무니없는 주장 즉 한쪽만을 보는 것이 아닌 모든 분야는 통합되어 있고 유기적인 시선, 다각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비와 생산은 엔트로피의 입장에서 같게 해석될 수 있고, 이는 우리의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트로피가 강력한 법칙이라 할지라도 무너질 여지는 충분히 있다. 여기서 무너진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틀린 법칙이라는 뜻이 아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법칙이 될 수 도 있다는 뜻이다. 리피킨은 뉴턴의 고전 역학이 하이데거의 불확정적 원리에 의해 무너졌음을 이야기 하며, 세계를 자동기계로 보는 고전 물리학을 버리고 우리는 세계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그리스적 패러다임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는 과학의 법칙의 보는 관점의 문제이다. 엔트로피 또한 충분히 재해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에너지에 대한 법칙이긴 하지만 이는 고전역학의 산물중 하나이며 원자의 세계에서 고전 역학처럼 다르게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분이고 시중꾼이라는 입장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자연, 즉 세계의 그저 작은 시스템 혹은 예술작품의 일부분이지만 모든 시스템과 예술작품은 일부분에 의하여 디테일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듯이 전체와 부분은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일부분이 전체를 망칠수도 있고 전체의 가치를 바꿀 수 있다. 2000년과 현재를 비교해 보면 인류는 18년 동안 말할 수 없는 비약을 했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물질적 불평등(기아 국가의 존재와 같이)이 존재하기에 조금 겸손해 질 필요는 있지만 운명론적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인류에 발전에는 긍정주의자와 비관주의자 두 명 다 필요하다. 긍정주의자가 비행기를 만들면 비관주의자는 낙하산으로 만든다.” 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결국 운명공동체라고 자각하고 다각적 시각을 갖는다면, 우리는 결국 답을 찾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엔트로피 법칙을 역전 시키는 맥스웰의 도깨비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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