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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앤 넘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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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183회 작성일 21-02-2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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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일상 생활에서 내가 이야기했던 것을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이 이야기한 것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일반적인 일상 생활에서도 그렇지만, 남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전문 분야를 설명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가끔 오랜만에 봤던 지인이나 친척이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잠시 머리 속이 혼란해진다. 반도체 소자인 트랜지스터부터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충 ‘반도체 공정’이라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혹은 조금 더 친절하게 ‘핸드폰 같은 전자기기에 들어가는 칩들을 만드는 일을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답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전공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설명하기에는 꽤나 괜찮은 대답이다.


 이러한 일들은 비단 전공자와 비전공자 사이에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본인의 연구를 남들에게 소개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얼마 전에 우리 연구실 사람들에게 나의 연구를 발표하는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이 발표를 준비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사용했는데,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했던 부분은 ‘어떻게 하면 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도 내 발표를 잘 이해시킬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최대한 어려운 부분을 빼고 알아듣기 쉽게 만들어 발표를 진행했다. 그럼에도 세미나 이후 동료들은 발표를 듣고 내 연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비슷한 주제를 연구하는 동료들도 발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의견을 온전히 전달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사한다.


 연구자에게 있어 좋은 주제를 선정하고 연구를 꿋꿋이 진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내 연구를 어떻게 남들이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연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알아듣게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반쪽자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연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과 일의 전반에 적용되는 이야기기이기도 하다. 애스워드 다모다란 교수의 <내러티브 & 넘버스>는 우리가 어떤 것을 설명할 때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스토리’와 ‘숫자’이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스토리텔러(storyteller, 이야기를 하는 사람)’와 ‘넘버크런처(number cruncher, 수치를 계산하는 사람)’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생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고등학교에서 본인의 서식지를 결정한다. 스토리를 좋아하는 스토리텔러들은 역사나 문학, 철학 심리학 등을 전공하면서 스토리텔링 능력을 기른다. 반면 숫자를 위주로 생각하는 넘버크런처 무리들은 숫자를 다루는 수업에 관심을 갖고, 대학에서도 숫자 관련 학문을 공부하면서 숫자를 다루는 능력이 향상된다.


 재밌는 사실은 두 집단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의심의 눈길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러들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지만, 숫자와 수식에 두려움을 갖고 복잡한 수식이 나오면 머리를 싸매거나 애써 무시한다. 반대로 넘버크런처들은 숫자를 객관적으로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수 백 페이지의 철학과 문학에 진저리를 친다. 시간이 갈수록 스토리텔러들은 넘버크런칭 능력이 감소하며 넘버크런처들은 스토리텔링 능력이 줄어든다. 서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신으로 시간이 갈수록 두 집단의 골은 메우기 힘들 정도로 깊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과’와 ‘이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스토리텔링은 매우 강력하고 매력적인 분야다. 사람들이 숫자를 들었을 때보다 스토리를 들었을 때 더욱 잘 기억한다. 학창 시절의 선생님들의 수업을 떠올렸을 때 수업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신 어떤 이야기나 일어났던 재밌는 사건들은 기억에 선명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어떤 흥미로운 스토리를 들었을 때 더 잘 기억하며, 이는 뇌에서 옥시토신과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잘 짜여진 스토리를 들었을 때 청자들은 스토리텔러가 말하는 가정과 관점, 그리고 결론을 더 기꺼이 수용한다고 한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청자들을 이끌어내는 데에 강력한 도구로 쓰일 수 있지만, ‘숫자가 없는 스토리’는 객관성을 잃고 잘못된 방향으로 편향하기 쉽다. TED 강연에서 타일러 코원은 ‘우리는 스토리를 너무 많이 말하거나 쉽게 유혹당한다고, 스토리로 인해 인지 편향이 심해진다’라고 말했다. 어떤 스토리에 빠지게 되면 그 ‘스토리에만’ 빠져서 다른 스토리를 듣지 않는 경향이 증가하고, 이러한 문제는 인간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데 있어 주요한 원인이 된다고 한다. 입담이 좋은 길거리 좌판상에게 만병통치약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객관성을 잃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이끄는 스토리텔링과는 다르게, 숫자는 스토리가 가질 수 없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다. 스토리만 나열된 발표와, 스토리에 숫자가 뒷받침된 발표를 들었을 때 어느 것이 더 신뢰가 가는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사람들인 입에 발린 소리보다는 객관적인 수치에 더욱 신빙성을 갖는다. 주관적일 수도 있는 스토리와는 다르게, 숫자는 객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공학을 하는 사람들이 숫자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도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리라. 숫자가 가진 정확성과 객관성은 청자들로 하여금 말의 설득력과 신빙성을 높인다. 청자를 설득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전달하고 싶으면 데이터(숫자)를 기반으로 하는 훌륭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학 분야에서 학위를 진행하기에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생들의 발표를 들을 때가 많다. 훌륭한 발표에 감명받고 직관을 얻기도 하지만, 어떤 발표를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발표자가 주장한 스토리가 엉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사고하거나 숫자를 처리하는 능력은 우수한데, 숫자(데이터)를 바탕으로 세워지는 ‘스토리’가 빈약하다. 스토리가 타당성이 없거나 개연성이 없는 경우도 많다. 데이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연구의 방향성이 애초에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중구난방으로 연구가 된 발표도 여럿 보았다. 이는 넘버크런처가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숫자를 다루는 공학자들은 당연히 숫자를 객관적으로 다루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숫자를 다루는 능력과 필적하게, 스토리를 다루는 능력도 넘버크런처가 가져야 할 필수적인 요소이다. 스토리가 결여된 숫자는 데이터가 쭉 나열된 스프레드시트를 가져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빅데이터 시대에 데이터를 잘 다루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잘 가공된 데이터를 잘 짜여진 스토리에 맞게 구성하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다. 스토리텔러와 넘버크런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기에 양쪽 모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의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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