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절창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대현
댓글 0건 조회 1,112회 작성일 26-03-15 17:45

본문

절창

-구병모-


'그애는 나의 질문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지극한,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원주율에 마지막 숫자가 뭔지 아십니까.'

제목인 '절창', 우리가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국어사전에 검색을 해보니 절창(絶唱)은 '가장 뛰어난 노래'를 뜻한다. 하지만,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단어는 동음이의어인 절창(切創), 즉 '날카로운 도구에 베인 상처'와 기묘하게 겹쳐지는데 이에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작가는 왜 이토록 아름다운 단어에 잔혹한 이미지를 덧씌웠을까. 아마도 타인의 심연에 닿으려는 모든 시도가 결국은 서로를 베고 마는 상처의 과정임을 그리고 그 선명한 통증만이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노래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상처를 통해 타인의 진심을 읽어내는 행위는 가장 추악한 상처가 가장 찬란한 진실로 치환되는 지독한 마법이자 역설이다. 이 책은 결국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과연 '축복'인지, 아니면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인지를 깊이 있게 다룬다.


깊은 물밑에 자리한 상대의 생각을 읽는 일은, 그 마음의 복잡성과 가변성으로 인해 대체로 오답을 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공 '아가씨'는 타인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그들의 기억과 내면을 읽어낸다. 이는 소통의 완성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소통의 불가능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보인다. 타인의 진심을 알기 위해 반드시 그에게 상처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는 잔혹하게 보인다. 문오언이 자신의 몸에 스스로 칼을 대어 상처를 만들고 아가씨에게 읽어달라 요구하는 장면은 소통을 향한 인간의 광기 어린 집착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낸 정보조차 결국 읽는 이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파편일 뿐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오만이며,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뻗을수록 서로의 살갗을 베어낼 수밖에 없는 고슴도치 같은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듯 하다.


'아무리 모르고 싶어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까지 모를 수는 없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닿을 수 없기에 비로소 완성되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서로를 완벽하게 데이터처럼 읽어낼 수 있다면, 인간 사이에 이해나 공감이라는 단어는 필요 없을 것이다.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곁을 맴돌고, 오해할지언정 읽어내려 애쓰며,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문오언의 자해와 아가씨의 고통스러운 공감은 그 자체로 처절하지만, 그 불가능한 융합에 도달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은 숭고하게 보인다. 닿을 수 없는 저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내지르는 비명,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말하는 '절창'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싶다.


구병모의 문장은 시종일관 차갑고 예리하지만, 그 끝은 늘 타인을 향한 지독한 갈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동반하는지 새삼 되새긴다. 타인의 내면은 정복해야 할 영토가 아니고 그저 묵묵히 바라봐야 할 거대한 심연이라 생각된다. 완벽한 소통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라도,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매개로 짧게나마 교차하는 그 순간들은 분명 가치가 있다. 비록 서로를 베고 아프게 할지언정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서로라는 악보 위에서 각자의 절창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타인이라는 미지의 텍스트 앞에서, 오해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보려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