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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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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희태
댓글 0건 조회 603회 작성일 26-03-1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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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하다."


 요즘 신혼집을 구하며 가장 자주, 그리고 뼈저리게 느끼는 감정이다. 


 어릴 적 평촌의 작은 아파트에서 자란 나는, 세상의 모든 집이 으레 아파트의 형태를 띠고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거실과 이어진 부엌, 부모님이 쓰시는 큰 안방, 그리고 나와 누나가 함께 쓰던 작은방 두 개.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집은 아니었어도, 나이가 들어 가정을 꾸리면 당연히 이런 공간에서 시작할 줄 알았다. 거실에는 텔레비전과 소파가 놓여 있고, 부엌 식탁에 앉아 보글보글 끓는 찌개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는 삶. 그것이 내가 생각한 '평범한 집'의 당연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내가 믿어온 당연함을 무참히 깨부수었다. 


 나와 여자친구가 가진 예산으로는 아파트는커녕, 지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은 10평 남짓한 낡은 빌라가 최선이었다. 실제로 발품을 팔아 마주한 집들의 민낯은 서글펐다. 붉은 벽돌과 차가운 알루미늄 섀시에서 배어 나오는 퀴퀴한 세월의 냄새. 두 사람이 마주 서기도 버거운 비좁은 주방과 낡고 찌든 때가 낀 화장실. 바닥에서부터 습기가 차올라 여기저기 누덕누덕 들떠버린 장판까지. 내가 어릴 적 평범함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은, 사실 아주 높은 비용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사치였다.


 단순히 통장의 잔고가 부족해서 밀려오는 서러움이 아니었다. "평범한 삶"이라는 정답을 좇아 치열하게 그어온 내 삶의 궤적이 결국 이토록 비좁고 습기 찬 공간으로 수렴한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정직하게 땀 흘려 미래를 준비하면 당연히 주어질 줄 알았던 평범한 안락함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견고한 성채였다.


 결국 낡은 빌라들을 뒤로하고 임대주택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곳의 문턱 역시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소득과 자산 기준이라는 조건표 앞에서 나의 상황은 늘 애매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것은 그다음 찾아온 감정이었다. 나는 30년 된 낡은 빌라 장판의 습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데, 국가가 정한 '가난의 기준'을 완벽하게 통과한 사람들은 번듯한 신축 고급 아파트의 임대 세대에 당첨되어 들어갔다. 가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쾌적하고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되는 이 기이한 시스템 속에서, 나는 그들의 가난을, 아니 그 가난이 쥐여준 결과물을 속으로 맹렬히 부러워했다.


 내 삶의 방향키를 쥐고 성실하게 나아갈수록 오히려 쾌적한 주거라는 기본권에서 멀어지는 나의 애매한 위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했다. 

 

 나침반처럼 정확한 답을 좇아 살려 했던 나의 노력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가. 


 이러한 나의 씁쓸한 물음표는 길란의 단편 소설, "복 있는 자들"의 주인공 희재와 그녀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며 더욱 무겁고 날카로워진다. 


 희재가 살고 있는 아현역 초역세권의 번듯한 신축 아파트는, 철저하게 가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허락된 공간이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벽지와 번쩍이는 대리석 주방, 손가락 하나로 온기를 채우는 자동 난방 시스템까지. 희재는 자신만은 남들과 달리 이 눈부신 '복'을 거머쥐었다며 스스로의 안락함에 취해 안도한다.그들은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임대주택의 쾌적함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다. 일반 임대주택의 짧은 거주 기간을 넘어 최대 20년까지 그곳에 머물기 위해, 이른바 '지속 가능한 가난'을 철저하게 기획하고 실천한다. 엄마는 법적으로 세대를 분리해 주소지를 옮기고, 주인공은 주거급여 수급 자격인 중위소득 43%(월 97만 원)를 넘기지 않기 위해 딱 그 선까지만 아르바이트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땀 흘려 일하는 대신, 현재의 안락한 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거세하고 가난의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복'이라고 표현된 신축 임대 아파트는 오히려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화려한 감옥이다. 이 기적 같은 안락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희재는 평생 자신의 삶을 가장 밑바닥에 결박해야만 한다. 행여나 땀 흘려 일해 단돈 1만 원이라도 더 벌어 제도가 그어놓은 빈곤의 커트라인을 넘어서는 순간, 복지의 울타리라는 이름의 온실은 산산조각이 나고 내가 서성이던 그 눅눅한 낡은 빌라촌의 시궁창 속으로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질 테니까. 이 화려한 감옥 속에서 벌어지는 모녀의 일상은 번쩍이는 대리석 주방의 풍경과 맞물려 한층 기괴하고 처절하게 다가온다. 냉장고에서 달콤한 복숭아를 꺼내 베어 물면서도, 그들은 결코 그 단맛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남은 복숭아에 억지로 흠집을 내어 반품하고, 기어이 그 푼돈을 다시 손에 쥐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할 뿐이다.


 작중 희재가 수영을 하는 모습은, 이 모순된 삶이 품은 갈등과 감정선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물속은 징그럽게 솔직하다. 강사는 중급반에 맞게 다리를 오므리는 '윕킥'을 하라 말한다. 다른 이들은 기꺼이 힘을 들여 우아하게 그 정석을 따르지만, 희재는 배운 대로 다리를 모으면 자꾸 밑으로 가라앉는다. 폼을 잡고 근육을 써야 하는 정석 대신, 그녀가 택한 건 편하고 익숙한 '개구리헤엄'이다. 숨차게 노력하지 않아도 꼼수로 다리를 쩍 벌리면 일단 쾌적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정석대로 살면 익사하고 마는 삶. 살기 위해 정석을 포기했건만, 그렇게 끝까지 개구리헤엄으로 발버둥 치던 희재는 결국 다리에 쥐가 나고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우는 건, 며칠 전 날아든 부정수급 의심 신고와 이 '복' 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지독한 불안감이다.


 희재는 왜 이토록 뒤틀려버린 걸까. 그녀가 태생적으로 악하거나 속물적이었을까. 단지 그녀는 평생을 바치고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아빠의 삶을 보며,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뼈저리게 학습했을 뿐이다. 그녀를 이토록 서늘하고 계산적인 인간으로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가난, 그리고 그 가난을 벗어나려 할수록 오히려 벼랑 끝으로 내모는 기형적인 복지제도다. 제도가 요구하는 완벽한 가난을 성실하게 연기한 대가는 결국 파국이었다. 소득 커트라인을 넘기지 않으려 아득바득 저축을 피한 탓에, 엄마에게 병마가 닥치자 화려한 아파트는 아무런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미래를 거세당한 안락함 속에서 그녀는 결국 온실 밖으로 쫓겨나고, 나를 이렇게 만든 사회에 처절한 저주를 내뿜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다시 눅눅한 내 현실로 돌아온다. 숨 막히는 물속에서 개구리 헤엄을 고집하다 끝내 가라앉아버린 희재의 모습 위로, 애매하다는 이유로 낡은 빌라로 밀려난 나의 서글픈 얼굴이 겹쳐진다. 쾌적한 임대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거세하고 가난을 연기해야만 하는 희재의 화려한 감옥이나, 치열하게 미래를 좇았음에도 퀴퀴한 장판의 습기를 맨몸으로 견뎌야 하는 나의 현실이나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이 잔혹하고 지독한 역설에서 정녕 '복 있는 자'는 누구인가. 


 발버둥 칠수록 밑으로 끌어내리는 이 거대한 모순의 수조 속에서, 대체 누가 더 비참한 건지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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