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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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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호석
댓글 0건 조회 435회 작성일 26-04-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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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의「사랑의 기술」를 읽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혹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깊은 감정적·정신적 상태

 

우리가 떠올리는 이상적인 사랑은, 순수하고 본질적인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뱉는’ 사랑이라는 것은 과연 그 본질에 가까운가.

이런 질문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쉽게 내뱉지 못하게 만든다.

아마 한 번쯤은 누구나,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지 의심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 하나의 구조에 가깝다.

저자가 말하듯, 사랑에는 ‘기술’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그 안에는 기대와 소유, 결핍과 불안이 촘촘히 얽혀 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

타인을 향한 마음이라기보다, 타인을 매개로 한 자기 충족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태초의 사랑은 어떤 상태였을까.

나는 그것은 욕망 이전의 상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욕망은 언제나 결핍에서 비롯되지만, 태초의 사랑은 결핍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음을 견디기 위해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이미 충만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존재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이 어떤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이었을 가능성이다.

이 지점에서 오늘날의 사랑은 근원적인 사랑과 분명히 어긋난다.

 

지금의 우리는 사랑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나는 충분한 존재인가”라는 불안의 변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붙잡으려 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해석하려 하며, 함께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비교한다.

이러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무거워지고, 때로는 서로를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태초의 사랑은 달랐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이해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는 상태, 그저 그가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 사랑에는 비교도, 평가도, 지속에 대한 강박도 없다.

사랑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었기에, 오히려 사라짐조차 위협이 되지 않는 상태.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무한과 영원한 것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 유한이 무한을 스칠 수 있는 순간은, 어쩌면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의 사랑은 무겁고, 때로는 파괴적이다.

그것은 사랑 자체의 타락이라기보다, 우리가 사랑을 욕망의 언어로 번역해버린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 속에서 사랑은 점점 본래의 모습을 잃어간다.

 

나는 이러한 (태초의) 사랑을 과거의 것으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욕망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잠시 멈추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 사랑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가 갈망하는 무한은, 그 근원적인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 위에 너무 많은 것을 덧씌워버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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