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11월 1일, 한국 대중가요 2명의 큰 별을 추모하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6,097회 작성일 20-11-06 00:35

본문

김현식 유품.jpg


고 김현식 아티스트의 유품들. (사진 제공 : 슈퍼맨C&M)

 


11월 1일이라는 날짜는,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는 크나큰 아픔을 안겼던 날로 회자되곤 한다. 1987년 11월 1일,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유재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0년 11월 1일, 유재하의 죽음 이후 대성통곡하며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현식이 공교롭게도 그렇게 아꼈던 유재하의 기일에 간경화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

 

처음 김현식의 노래를 접한 건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날, 집으로 가는 택시 안이었다. 음악 기기 안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마치 쇳소리가 섞인 것처럼 허스키한 보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묘했다. 음정도 맞지 않는, 거칠기만 한 듯이 보이는 노래가 이상하리만큼 와 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사님께 이 노래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라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기숙사에 도착해서 노트북을 켰다. 그 때 이후로 김현식이라는 아티스트에 대해서 많이도 찾아보았다. 그리고 많이도 들었다. 그때 스쳐갔던 노래 중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곡은, 지금도 내 노래방 ‘18번’으로 자리잡고 있다. 김현식을 듣게 되면서 그가 유난히 아꼈던 후배인 유재하에 대해서도 많이 듣게 되었다. 사실 그 전에도 유재하가 남긴 최고의 명곡으로 뽑히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즐겨 듣고는 있었지만.


김현식은 1980년, <봄여름가을겨울>을 타이틀곡으로 한 첫 1집 앨범을 선보인다. 김현식을 처음접한 곡인 <내 사랑 내 곁에>와는 달리, 이 때의 그는 굉장히 맑은 미성의 소유자로 가성까지 넘나들었다. 그러나 이 앨범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를 비관한 김현식은 이후 술과 담배에 절어서 살았다. 그러다 신촌의 어느 옷가게에서 김경자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82년에 결혼해서 서울 용산구에 살림을 차리고는 그 주변에서 피자가게를 차리게 된다. 후에 본인은, 이 때를 자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 회고하였다고 한다.


1983년, 그는 가게를 접고 밤무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84년 10월에 <사랑했어요>를 타이틀곡으로 발매한 2집 앨범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85년에는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박성식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도 사실 웃지 못할 일화가 하나 있는데, 원래 박성식은 나중에 급히 영입한 멤버이고 원래는 유재하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당시 3집을 준비 중이었던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을 써 오라는 주문을 하자 유재하는 그때 당시 자신이 지금까지 써왔던 자작곡 10여 개를 전부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김현식이 형평성을 맞춘다는 이유로 멤버당 한 곡씩만 앨범에 넣겠다고 하자 유재하가 삐져서 그룹을 나간 것이라고. 이 때 김현식이 받은 곡이 그 유명한, 후에 “볼빨간사춘기”가 리메이크해서 다시 조명되었던, <가리워진 길>이라는 곡이다. 이후 영입된 박성식이 써왔던 곡 또한, 개인적으로 김현식 최고의 명곡이라고 꼽는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곡이다.


김현식, 유재하.jpg


왼쪽 : 유재하 / 오른쪽 : 김현식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식과 유재하는 서로 술 한잔을 기울이며 잘 지냈다고 한다. 당시 유재하는 대중음악을 하는 선배들이 유난히 예뻐했는데, 특히 김현식이 유재하를 너무나 아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김현식은 그 특유의 괴팍한 성질 때문인지 구타와 폭압으로 후배들을 이끄는 스타일이었는데, 여기서 유재하는 언제나 열외였다고. 사실 선배들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팝이나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고상하게 바라본 반면 가요는 예술이 아닌, 소위 ‘오락’이자 질 낮은 ‘딴따라’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대중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음악적 지식은 고사하고 악보조차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흔히 ‘삘 (feel)’이라고 부르는, 느낌이 오는 대로 음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에도 알아주는 명문이었던 한양대학교 작곡과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대학생이 대중음악을 하겠다고 들어오니, 선배들 입장에서는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평상시에도 술과 담배를 즐기며, 심지어 대마초까지 손을 댔던 김현식은 점차 목소리가 미성에서 허스키하고 처절한 분위기로 변해갔다. 1987년, 유재하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자 김현식은 추모의 의미로 4집 음반에 유재하의 유작인 <그대 내 품에>라는 곡을 수록한다. 이후 술에 빠져 죽겠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술을 가까이하다가 간경화에 걸리게 되었고, 그 상태에서 병상을 탈출해가면서까지 작업하며 세상에 나온 것이 5집이고 이것은 김현식 생전 마지막 앨범이 되고 말았다. 유재하가 세상을 뜬지 정확히 3년 후의 11월 1일, 그는 간경화로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어디선가 보았던,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가 댓글로 적어 내었던 감상평 한 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랑이 목소리를 가진다면, 아마 미성은 아니겠지.”


음악이 아름다운 것은, 인생,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둘이 목소리를 가진다면, 결코, 미성은 아니리라. 김현식은 정해진 형식이나 틀을 벗어난, ‘순수한 사랑’을 노래했기에 사랑의 ‘가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간경화로 만신창이가 된 성대를 가지고, 그 갈라지고 탁한 생소리로 노래한 것이 고독함과 세상에 이리저리 치인 이들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한편, 어눌하고 음악적 테크닉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담백한 유재하의 노래는, 그 담담한 태도로 노래하는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 시릴 정도로 와닿는다. 오죽했으면 ‘한국의 머라이어 캐리’라고 불리는 박정현이 유재하의 앨범을 듣고, 노래는 고음과 테크닉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을까.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연구실 책상 위의 내 아이패드에서는, 마침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이어폰으로 흘려주고 있다.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특히 비가 올 때면 더더욱, 직접 내린 커피 한 잔과 함께 이 곡을 들으며 멍하니 감상에 잠기는 것은 비교적 오래 된, 내 행복한 습관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짜인 11월 1일, 그 위대한 음악적 여정을 조기에 마감해야 했던 이 둘을 잠시라도 더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