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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벰버 로드 – 루 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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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843회 작성일 20-11-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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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벰버 로드 – 루 버니

이규섭

 

 역사 공부를 할 때,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를 하면 쉽다고 말하곤 한다. 굵직한 사건들은 너무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반드시 그 다음의 굵직한 사건과의 인과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가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도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올해 일어난 큰 일들이 이른바 굵직한 사건으로 남을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삶 속에서 마주치는 큰 사건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던 경우와 많이 다르다. 그것은 분명 조금씩 관련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퍼져나가면서 일상이라는 이름의 잘 짜여진 톱니바퀴의 아귀를 틀어지게 만들 것이다. 일련의 변화가 이윽고 나의 삶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다가 올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기에 어느새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J.F. 케네디의 암살 사건 소식을 들은 세 주인공과 함께 시작된다.

기드리는 본래 지역 권력가인 카를로스의 조직에 속한 수행원으로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삼으며 쟁취해낸 별 것 아닌 삶을 이어나가고자 애썼다. 그를 처음 조직에 소개해준 매키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느 때 처럼 조직의 업무를 위해 ‘엘도라도’ 차량을 준비해 둔 것이 그의 목을 옥죄게 된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그 다음날 ‘엘도라도’를 조용히 처분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그가 준비한 차량이 케네디 암살범의 범행에 사용되었고, 그에 연루된 자신 역시 카를로스의 증거 인멸을 위해 살해당하게 될 것을 직감한 기드리의 도망이 시작된다.

바로네는 카를로스 조직의 의뢰를 받는 살인 청부업자다. 기드리를 잡기 위해 여정을 떠난 그는 갖은 고생 끝에 기드리의 뒤를 쫒는데 겨우 성공하지만, 바로 코앞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를 장기말처럼 활용한 세라핀을 저주하면서.

샬롯은 평범한 가정주부다. 그녀는 악인은 아니지만 형편없는 남편과 꿈을 잃어버린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민 속에서 살아 왔다. 처음에는 늘 그래왔듯,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사회가 당시의 여성에게 강요하듯, 인내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견뎌왔던 그녀였다. 주어진 삶 안에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자. 그렇게 틈나는 대로 사진관에서 알바를 하면서 주인에게 사진을 귀동냥으로 배웠다. 남편의 형편없는 벌이도, 그 나이에 시부모의 지원을 받는 수치심도, 사진가가 된다는 허황된 꿈을 떠올릴때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의 시골 마을 여성에겐 사진가로써의 능력을 아무도 기대하지않았고, 기회라고 불리울 첫 걸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케네디의 죽음으로 미 전역이 슬픔에 물들자 이러한 변화의 바람이 자신의 삶에도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며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길을 나선다. 남편이 또다시 술을 마시러 나간 사이, 그녀는 아이들과 질환이 있는 애완견 한 마리를 데리고 길을 떠난다.

야심차게 떠난 것과 달리 금방 위기에 봉착했다. 돈은 부족했고, 끌고 나온 차는 고장 나 버렸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방식은 두가지였다. 무시하고 지나치거나, 음흉하게 바라보거나. 무턱대고 캘리포니아의 이모에게 가면 되겠지 생각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왕래가 없는 친척은 남과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이 말했듯. 결국 당신은 돌아오게 될 거 였고, 그녀의 어머니가 늘 말했듯, 어디든 지금의 길보다 더 거칠고 험한 길이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게 땐 걸음의 결론을 얻기 위해 다시 한 번 운명에 몸을 맡겨 보기로 했다. 그렇게 기드리를 만난다.

처음에 기드리는 바로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샬롯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렇게 기드리는 카를로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 샬롯은 아이들과 캘리포니아에 도달하기 위해서 라스베이거스를 향하게 된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기드리와 샬롯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조금씩 그들의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에 바로네 역시 자신의 목적지에 다다른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게 만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스베이거스의 권력자인 에드를 이용하려던 당초의 목적은 에드가 집사인 로스에게 사살당하면서 틀어진다. 샬롯은 기드리를 죽이러 온 바로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네는 멍청한 실수로 샬롯에게 치명상을 입는다. 결국 셋 중 어느 누구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기드리는 애써 돌아 왔지만 샬롯은 기드리와 함께 나라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자립하고 싶어 집을 떠나온 것이기에 또 다시 누군가에 기대어 자유를 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기드리의 방에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기드리는 떠나려 했지만, 바로네의 말이 떠올랐다. 카를로스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녀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베트남으로 떠나려 했던 기드리는 결국 마지막에 카를로스를 직접 찾는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더 이상 자신과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거래를 한다. 카를로스는 이를 수락하고 기드리는 결국 처음의 장소로 돌아와 조용히, 그리고 약간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기드리는 자신의 삶과 샬롯의 자유를 교환한다.

 

크나큰 변화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진다. 전쟁이 나면 어떡하지? 정책이 또 어떻게 바뀌는 거지? 누군가는 조리있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려고 하고, 누군가는 그러한 흐름에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려 한다. 매 선거 때마다, 때론 가끔 북한 이슈가 터질 때 마다 이런 큰 변화에 나는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계속 잘하자 같은 생각 사이를 오가곤 한다. 솔직히 국제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큰 문제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힘 밖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자포자기 하고 살자는 건 아니다. 다만 요즘엔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방향성만 있다면 사실 따로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는 케네디의 죽음으로 벌어진, 그러나 케네디 본인과는 정작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삶은 ‘그 총격’ 이후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지만, 그 원인이 사건 자체에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큰 변화 앞에 버틸 수는 없었지만, 결코 자신의 삶 앞에서 무력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처럼은 아니었지만, 결국 모두의 기대에 한 방 먹여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은 불필요할 정도로 공평해서 올라 타려 한다고 늘 맘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거스르려 한다고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똑똑한 척을 다 했지만 결국 별다를 것 없는 결말을 맞이하는 수 많은 사람들과 뻔히 다가오는 변화의 흐름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고집을 부리다 꺾여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그 증명일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누군들 쉽게 의욕을 잃어버리고 만다. 열심히 해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의욕이 생기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큰 변화를 앞둔 사람에게는 ‘과감함’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샬롯은 자신에게 그런 과감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수시로 절감하고는 했다.

헌데, 이 과감함이라는 것이 참 애매하다. 많은 걸 가진 사람은 당당하기 쉽다. 카를로스와 에드 같은 거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한 두가지 실패하더라도, 그의 인생에는 언제나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르다. 한 번의 실패로 모든게 끝나버릴 수 있다. 모든게 끝나버리진 않겠지만 분명 삶이 송두리째 변해버리고 만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변화 앞에서 이들에게는 무모함이 요구된다. 그러니 ‘과감함’이란 것은 용기 따위가 아니라 리스크를 짊어지는 행위일 뿐이다. 똑같은 상황 앞에서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당당하고 과감한 것이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은 혼신의 준비 끝에도 잔뜩 긴장한 채 겨우 한발 내딪는다. 기드리처럼 테이블 아래서는 손을 벌벌 떨면서 애써 놀라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럼 뭐 어떤가?

코로나 19로 세상이 떠들썩 해진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나야 학교 안에 갇혀서 금새 익숙해져 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어 버렸다. 분명 역사의 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이 변화가 또 어떤 다른 사건을 불러 일으킬지 누군가는 쉽게 예상가능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이를 이용하려 들 것이고, 누군가는 그저 이를 기회 삼아 원하는 바에 좀더 집중하고자 할 것이다. 어차피 정답은 아무도 모르고, 물결은 계속 일렁이고, 우리는 이 망망 대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도, 휩쓸려 어딘가 알지 못하는 해안가에 떠밀려 가더라도, 가라앉지만 않으면 그곳에서의 삶이 있을 것이다. 분명 거대한 물결은 우리의 위치를 바꾸어 놓을 것이고, 우리의 발버둥은 그 큰 변화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세상엔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그 안에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선택하 수 있는 폭이 얼마나 다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열심히 파닥거리는 것이다. 이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어떤 멍청이가 우리를 우습다고 말할지라도 뭐 어떠랴. 좀 서글프긴 하지만, 삶의 의미는 우리의 위치가 아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달려 있다. 기드리는 카를로스에서 도망치기위해 오만 고생을 다했지만 결국 자신의 동네로 돌아와 죽었고, 샬롯은 끝내 사진작가가 되지 못했다. “뭐야, 이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거 잖아?” 라고 말하지 마시길. 그들의 삶은 분명 변화했고, 진화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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