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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품격 - 이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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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호
댓글 0건 조회 6,101회 작성일 20-11-10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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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품격
이기주

한 무사가 있다. 적이 나타나자 급하게 칼집에서 칼을 빼 든다. 그의 움직임을 과감하게 보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두려움이 묻어있다. 그는 잠시 지체한 뒤 칼을 들고 상대에게 돌진한다. 칼을 휘두르는 형세가 거칠고 그의 마음을 닮아 조급함이 담겨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하수라 부른다. 다른 한 무사가 있다. 적이 나타나도 그에게 급함이 없다. 칼은 칼집에 남겨둔 채로 상대방을 지극히 바라본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엄이 있는 법이다. 상대는 무사가 지닌 당당함과 위엄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무사는 칼을 빼 들지 않았지만, 이미 결투에서 승리하였다.

말이란 칼과 비슷한 것이다. 언어의 온도로 유명한 이기주 작가의 에세이집 '말의 품격'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말이란 마치 그릇과 같아서, 우리의 생각이 말에 묻어 나오고, 우리의 감정이 어투로 나타나며, 우리의 수준이 어휘에서 드러난다. 이기주 작가는 '말의 품격'을 통해 이토록 중요한 '말'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해야 할 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안내해준다. 책에는 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경청'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 깊게 와닿았다.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同論 計)."
"온갖 방책을 의논했다(百爾籌策)."
"밤낮으로 의논하고 약속했다(日夜謀約).

난중일기에 나온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운주당은 밤낮없이 불이 늘 켜지며, 지휘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장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운주당에서 참모진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순신 장군은 운주당의 문턱을 낮추었다. 중간급 간부들은 물론 일반 병사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과의 해전을 준비하면서 운주당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눈앞에 있는 칼을 휘두르는 일본군은 병세를 파악하고 제압할 수가 있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물길과 바람의 방향은 쉽게 알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해당 지역 출신 병사들과 때로는 민간인들까지 불러 술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렸다. 병사들과 백성들의 이야기가 이순신 장군의 귀에 들어왔다.

이순신 장군은 운주당에서 시간을 보낸 후 늘 다음 날 아침에 한 손에 일지를 든 채로 배를 타고 근방을 둘러보았다. 이순신 장군은  전날 밤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의 흐름과 바다의 깊이, 암초의 위치 등을 파악한 후 해도에 기록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은 전투가 일어날 바다의 요소요소를 상세히 알 수 있었고, 전투 때마다 일본군을 격파하며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은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될 수 있던 것은 어쩌면 그가 경청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원균이 이순신의 지휘권을 빼앗은 이후, 소통의 장이었던 운주당은 원균의 작은 미오성이 되었다. 원균은 운주당에 자신의 첩을 들이고, 그곳에서 날마다 술을 즐겨 마시고 술주정을 부렸다. 원균은 운주당에 두 겹의 장막을 둘러치고 병사들의 이야기 듣기를 멈췄다. 운주당이 소통의 장에서 불통이 장이 된 이후,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군에게 철저하게 괴멸당해버리고 만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경청의 힘을 알 수 있다. 듣는 것에도 종류가 있다. 능동적인 듣기와 수동적인 듣기가 그 종류이다. 경청은 단순히 자리에 앉아 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수동적인 듣기가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깊은 아픔을 보듬으며, 때에 따라서는 반응하고 답변을 주기도 하는 능동적인 듣기이다. 우리 사회는 경청에 매우 인색하다. 자기 PR 시대. 자신을 남에게 소개하고 자기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말의 총량이 듣기의 총량보다 적을 때 우리는 불안해한다. 말을 적게 하면 공연히 손해 보는 것과 같은 박탈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말하기를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나는 말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오죽하면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부모님께서는 내게 아는 것을 뽐내기보다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고 여러 번 다독이셨을까? 나이가 들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수록 나는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마주쳤다. 그때마다 나는 내 생각을 모두 꺼내는 것에만 집중했지, 남의 말을 듣는 데에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에 제대로 된 관심을 가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의 말의 본질, 담긴 메시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 해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인데 왜 그리 듣는 데에 인색하였던지... 나는 칼을 휘두르는 하수와 다를 바 없지 않았는가?

이제는 상대의 이야기를 가슴을 담아보고자 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나만의 운주당을 지어야겠다. 이제 입에는 조금 힘을 풀고, 그 힘을 귀를 세우고 눈을 바라보는데 사용해보자. 상대의 가슴에서 퍼 올린 말을 귀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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