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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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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근
댓글 0건 조회 6,323회 작성일 20-11-30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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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은 이과생들에게는 너무 친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설령 물리를 그리고 공학계열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이 사고 실험과 아인슈타인의 등장이 20세기 과학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분류하기에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이 작품은 나에게 있어서 올해 얼마 전에 접했던 이기적인 유전자와 함께 다른 방향으로 사고를 가질 수 있게끔 해준 과학 저서이다. 전기전자공학이라는 전공을 다루고 있어서인 만큼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어렵지 않았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잘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학문을 넘나드는 생각, 깨알 같은 표현력까지 품격있는 과학 교양 저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양자역학만 다룰 것 같아 보이지만 고전역학 중 전자기학에 대한 이야기 와 수학에서 무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생물학적 이야기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즉 전공서와 같은 물리학 저서라고 보기보단 과학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이 넌지시 들어 볼 수 있는 교양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제목이 슈뢰딩거의 고양이인 이유는 나의 시선에선 투명하다. 작가의 주재의 의식이 이것이다, 라고 단언하긴 힘들지만, 작가는 과학사와 과학적 사실을 통해서 독자의 인식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느꼈고 이에 가장 부합하는 과학사와 과학적 사실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즉 양자 역학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 우리는 과학적 관점과 관찰자에 대해서 조금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우리가 배우는 물리학, 수학, 서양 철학마저 발전과정과 어디서부터 시작한지 살펴보면 피타고라스의 세상의 수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데카르트가 정리한 이분법적 사고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을 걸쳐 발전했다. 우리는 기초적인 사실을 정의 하고 그것을 이용해 논리를 발전해 왔다. 예를 들자면 데카르트는 x 축과 y축을 나누었고 축의 역할을 정의 해 감으로 써 그 위에 그려진 곡선을 분석해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한 정의는 절대적이라는 위상을 차지하게 됐다. 비단 과학 뿐 아니라 이런 이분법적 접근은 철학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근대 철학을 집대성한 칸트는 세상을(인식을) 물 자체 와 현상계로 나누어 해석했으며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상 세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 정의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 논리와 인식을 바탕으로 한 철학에서는 이 정의를 증명할 길이 쉽지 않았지만 과학 수학에서는 우리의 눈으로 인식할 수 있을 적도 정확하게 각각의 정의를 증명했다. 이 관점 즉 x, y를 정의하는 행위와 그것을 인식하여 써먹은 관찰자는 고전역학에서 논의할 필요 없이 자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상은 20세기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에 의하여 흔들리게 된다. 이에 발맞추어 철학에서는 니체를 필두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서 비판하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서로 다른 상대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것으로 측정하며, 그 대신 물리 법칙의 내용은 관측자 모두에 대해 서로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시간 축이라는 고전역학에서 절대적이었던 가치에 대한 도전이었고 관찰자와 피 관찰자에 대한 생각을 환기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어쩌면 아인슈타인에게는 역설적으로 양자역학을 발전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발견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 알파입자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고양이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상자 속에 들어있고, 이 상자는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유리병과 연결되어 있다. 청산가리는 유리병에 가로막혀 상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청산가리가 든 병 역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유리병이 깨지는지 볼 수 없다는 사고 실험은 “전자의 궤도는 누군가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난다.”를 의미하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전적 인과관계가 도전을 받는 상황을 물리학에서 발견한 것이다. 원자는 불확정성을 가지고 있다. 이 생각을 우리 일상에서도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 오지면 음식점에 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메뉴를 선택할 것인지 미리 알지 못하다. 종업원이 와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묻는 순간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음이 없다면 확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불확정성은 단순한 미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물음을 통해 상태를 종결짓겠다는 뜻도 아니다. 원자가 언제든지 적극적인 상태 그러니깐 상태가 변화할 수 있는 상태로 전환이 가능 하다는 뜻이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간단히 말하면 원자는 같은 준위의 에너지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이 발견은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보였던 고전역학을 부정했으며 겉으로 보았을 땐 같지만, 알고 보면 다르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시적 시점 또한 틀린 것이 아니기에 다르면서 동시에 같은 것을 의미한다. 파울리는 내부와 외부의 본질적 동질성을 확신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괴테의 에피레마를 인용한다. ‘안에도 아무것 없고, 밖에도 아무것이 없네, 안에 있음이 곧 밖에 있음이기에’ 이 인용은 나로 하여금 불교 철학 동양 철학을 환기하게 한다. 불교에서 흔히들 말하는 연기법, 혹은 색즉시공공즉시색의 내용이 이런 내용 아닌가. 유가 철학의 인내천 사상 인 사람과 천 우주 또는 신은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통합적 사고는 서양 즉 이분법적 사고를 토대로 발전한 국가보단 동양에서 많이 발전해 왔다.

  

 

작가의 태도는 일정하다. 계속해서 생각을 좀 더 넓혀 보라는 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물리학에서 관찰자와 피 관찰자를 나누는 것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다시 작가가 예를 든 음식점 이야기를 해보자 나의 점심이 확정하는 것은 나 혼자 되는 것도 아니고 종업원이 정해주는 것 또한 아니다. 종업원과 내가 확정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정이라는 주장과 반이라는 주장을 하는 그룹이 있다고 하자. 그 그룹들끼리 합이라는 결과를 확정하는 것은 정만 있어서가 아니고 반이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즉 정과 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에게 좀 더 통합적인 생각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내가 정이기 때문에 반을 미워할 수 없을지 모른다. 내가 정이기 때문에 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을 주장할 때 가끔은 우리의 관점을 넓혀 보아야 한다. 관찰자일지라도 피 관찰자와 함께 하기 때문에 확정되는 순간은 둘이 상호 작용을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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