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인 센스
페이지 정보

본문
플레인 센스
김동현 저
비행을 좋아하는가? 나는 솔직히 비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여행은 좋아한다.) 공항에 가서 짐을 검사하고 액체류와 리튬배터리는 수화물에 꼭 보내야 하고 이륙할 때 귀의 먹먹함을 견뎌야 하고 오랜시간 동안 안전벨트를 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절차들이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에 휴가를 받으면 항상 비행기에 몸을 싣곤 했다.
이 책은 왜 비행기에서 그런 절차가 생겼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비행인문학이다. 미 연방항공국이 ‘모든 비행 규정은 피로 쓰였다.”고 한 것처럼 비행과 관련된 규정은 사실은 하나하나마다 사건과 사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 서부 개척 시절에 강도들은 마차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서 마차를 추격해 노략질을 했다. 강도들은 달아나는 마부 옆으로 바짝 붙어서 권총을 머리에 들이대고 “Hi, Jack”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이것은 사실 “이제 그만 마차를 세우지?” 하는 협박이었다. 비행기 납치를 하이재킹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래 되었다. 하이재킹의 상황이 되면 기장의 표준 대응 매뉴얼은 일단 납치범이 요구하는 대로 비행을 계속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승객의 안전을 위한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대응방안은 911테러를 통해 비행기가 자살 테러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 후 바뀌었다. 하이재킹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것 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하는 것은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탑승객의 신원과 소지품을 철저하게 검색하고 탑승하는 절차가 마련되었다. 그동안 테러범들은 총, 칼 뿐만 아니라 치약, 로션, 음료와 같은 액체 형태의 인화 물질과 개인 전자기기에 들어있는 소형 배터리로 폭탄을 제조해 비행기를 장악했다. 공항에서 보안 요원들이 액체류를 압류하는 것도 이런 형태의 액체 폭발물이 테러의 무기로 사용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치약을 자주 걸렸는데 (이상하게 치약은 액체라는 생각이 안들어서 종종 놓치곤 한다.) 이것이 하이재킹을 방지할 수 있다면 그동안 압수당한 치약이 그렇게 아깝지는 않다. 그리고 재미있었던 것은 처음에 소지품 검사 절차를 도입할 때 오히려 항공업계가 반발했다는 점이다. 검사 인력에 대한 비용과 복잡한 탑승 절차 때문에 고객이 비행기 대신 기차나 자동차를 선호하게 될 수 있다는 너무나 자본주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타면서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다. 기내 화장실에 ‘흡연금지’ 라고 써있는데 그 옆에 재떨이가 비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객실에서 화재가 나서 승객들이 일산화탄소에 중독 되더라도 산소마스크는 내려오지 않는다. 객실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산소마스크를 작동하면 화재가 더욱 악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재는 비행기 조종 시스템의 센서를 마비시킨다. 때문에 기내 화재는 여객기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비상상황이다. 기내 화재 원인의 대부분은 흡연 때문이었다. 1990년대 말이 되어서야 기내 전면 금연이 법제화 되었다. 그럼에도 재떨이가 남아있는 이유는 법을 무시하고 몰래 담배를 피우는 승객들에게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격리된 재떨이에 비벼 끄도록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화재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재떨이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대부분 담배꽁초는 휴지에 싸여진 채로 쓰레기통 깊숙한 곳이나 변기에서 발견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고 비행기를 탑승 할 때 거치는 절차들이, 사실은 그 역사의 무게가 있고 그렇기에 비행기를 탈 때 그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덕분에 나도 앞으로의 비행은 조금 더 즐거워질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 코로나 상황이 나아져서 여행을 맘 편히 갈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그의 직업에 대한 철학이었다.
작가는 조종사의 레벨을 반응적Reactive, 선제적Proactive, 예측적Predictive 3단계로 분리했다.
제주공항을 출발해 김포를 가던 한 여객기가 뇌우 속으로 들어가 기체 전방의 레이돔이 떨어져나가고 조종실 방풍창이 박살 나는 사고가 있었다. 이 비행기의 기장은 조종실 창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김포공항에 착륙했고 비행기에 타고있는 200여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활주로를 전혀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수동비행으로 안전하게 착륙한다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조종실력이다. 사고직후 해당 항공사는 조종사들에게 사내 최고 포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사고경위를 조사한 사고조사 위원회는 조종사가 뇌우로 들어간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다. 사고가 난 당일 같은 항로를 비행한 다른 비행기들은 뇌우를 사전에 분석해 적절히 회피하는 항로를 택했는데 이 조종사만 레이더의 반향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아 극한 상황으로 비행기를 몰고 들어간 것이다.
이 조종사는 비록 모두가 무사 했을지라도 반응적Reactive 수준에 머문 것이다. 다른 조종사들은 뇌우를 분석하고 항로를 변경 요청하는 선제적Proactive 사고를 한 상황에서 말이다. 가장 높은 예측적Predictive 수준은 인천공항처럼 민감한 군사 공역과 인접해 있거나 항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 주변 공역의 상황까지 살펴서 전략을 짜고 항로를 검토하는 조종사이다.
이 레벨이 비단 조종사에서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초보 엔지니어는 측정 결과값이 나오면 해석한다. 반응적Reactive 레벨인것이다. 중간 엔지니어는 측정을 의뢰하면서 어떤 결과값이 나올지 예상해본다. 선제적Proactive 레벨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예측적Predictive 레벨은 어떤 엔지니어일까? 어떤 결과값이 나올지 예상하고 그에 맞는 다른 실험이나 제안을 미리 설계해 두는 엔지니어가 아닐까? 이 직업에 10년을 몸담고 있는데 나는 어느정도 레벨의 엔지니어인가.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해야할까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다.
진정으로 본인의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 이 책이 그렇다. 작가는 심심하면 취미생활(?)로 ‘비행 사고 보고서’를 읽는다고 한다. 그런 저자가 풀어놓는 재미있는 비행기 인문학이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도 반도체 공정 사고 보고서를 취미생활로 읽는 날이 올까?
- 이전글고양이를 버리다. 20.11.06
- 다음글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20.11.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