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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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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6,121회 작성일 20-09-04 00:02

본문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본문 中

 

‘피로사회’.

 

책의 제목만 보고는 그저 그런 현대인의 초상을 다룬 뻔한 책인 줄만 알았다. “고려대학교 금속공학 졸업.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문학 전공. 철학자 하이데거에 대한 연구로 박사 취득. 현재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한 줄 넘기자 나오는 지은이 한병철 교수님의 이력을 보고 든 생각은, “세상에, 내가 본 이력서 중에 가장 특이하다. 범상치 않다.” 결국 책을 집었다. 원래 약력이 특이할수록 더 재미있는 발상이 나오는 법이 아니던가.

 

근대에 오기까지, 서양사는 ‘부정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거부, … 저자는 이 책에서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는 다소 독특한 용어로 정의한다. 이것이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으로 바뀌어 왔다. 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 오늘날 우리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자유의 시대에 산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저마다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권리가 있다. 복종과 권위가 지배적이었던 과거를 지나, 그 자리를 살짝 비켜주고 (사라지지 않았기에 ‘살짝’이라는 표현을 쓴다), ‘성과(成果)사회’, ‘성과주체’가 들어서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인이 우울함을 느끼는 요인은 바로 이 ‘긍정성’의 과잉 때문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지난 시대는 면역학적 시대,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이 매우 뚜렷했다. 면역학적 행동은 결국 ‘낯선 것’에 대한 공격과 방어이다. 그러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면역학적인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가 없는 구도가 되어가고 있다. 폭력이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다. 여기에 대해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라고 언급하며,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를 지적하였다. 지방은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궁핍한 시대에 사람들은 ‘흡수’, ‘동화’에 관심을 갖는다면, 과잉의 시대에서는 ‘배척’, ‘거부’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보편화된 매스 커뮤니케이션, 정보의 과잉은 마치 지방이 사람의 몸을 망가뜨리듯이, 인류 전체의 저항력을 떨어뜨릴 위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본문 中

 

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타자 착취’를 매우 문제삼곤 한다. 그 목적이 ‘생산성’을 위해서라면, 그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방식이 점차 타자 착취가 아닌 성공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일종의 착취의 진화라고 표현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한계에 부딪히자, 보다 한 단계 ‘진보’한 방식이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업은 정보의 급류를 타고 성공적인 인간, 성공적인 삶이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이끌린 사람들, 그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마치 자동차의 바퀴가 굴러가며 닳아 없어지듯이, 그 과정에서 인간 자신은 마모되어 간다. 따라서 저자는, 이 집단적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서 각성해야 하고, 거기서 이 시스템의 변화도 비로소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불편하다. 올해 읽었던 책 중에 이보다 불편하다고 느낀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전형적인 ‘성과 지향’적 삶을 살아온 나는,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법밖에 배우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 좀 하라고 다그치는 게 일상일 선생님들은 나를 보며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면서 독종이라고 불렀다. 학부 시절 과학고 친구들과의 학력 차를 극복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부 시절까지는, 내가 이렇게 처절하게 노력한 이유는 책에서 말한 ‘성공적인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좋은 능력, 좋은 머리, 좋은 기반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나는 어떤 것을 새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심각하게 느린 편이었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시간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능력이 없다면, 기반이 없다면,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힘든 세상이다. 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누리기’에는, 더더욱 삭막한 사회다.

 

‘현대인의 우울’이라는 흔한 클리셰가 사회가 아닌 개인의 긍정성에 기인한다는 신선하면서도 불편한 시선. 이 책의 메시지가 옳은 말이라고 할 지라도,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더욱 많은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내가 지금까지 ‘진취적’이라고 생각했던, 몇 안되는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이 집단적 우울함을 생산하는 한 부품에 불과했다는 뜻도 된다. 뭐가 맞든, 나는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계속 가보는 수밖에. 먼 훗날, 젊은 시절의 내 자신에게 미안했다고만 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있지는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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