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신의중
댓글 0건 조회 6,081회 작성일 20-10-10 10:18

본문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 구병모

 

주인공 '정주'는 임신 중인 디자이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가려는 참이다. 정주의 남편인 ‘이완’이 갑자기 시골의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장 살만한 집 역시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썩 마음에 들지 않거니와 이완의 근무지와 멀리 떨어진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아이를 밴 이 상황에 갑자기 환경이 바뀌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 정주의 친정에서는 공기 맑은 곳에서 애를 키우니 친환경적이고 얼마나 좋냐며 자신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장점들로 딸 아이를 타일러 보았다. 정주의 친구들도 공기 좋고 물 맑은 귀촌 생활을 즐기라는 말로 나름의 위로를 건네지만, 1주일이 넘도록 집을 수리하고 가스와 인터넷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정주에게는 그 얕은 관심이 불편하기만 하다.

 

이사 첫날부터 동네 할머니가 불쑥 집 안으로 들어와 집을 구경하겠다고 하고, 부풀어 오른 배를 마음대로 만지며 아들이냐 딸이냐 묻는다. 이렇게 크다면 아들이 확실하다고 말이다. 그리곤 젊은 사람들이 요새 애를 안 낳는다는데 애들 가져서 장하다고 정주를 치켜세운다. 노부부에게는 친근감을 건네는 인사일지 모르겠지만 정주는 이런 대접이 부담스럽다.

 

“나 얼마 전 읍내까지 나가 신문에서 봤는데, 요즘 젊은 여자들이 그렇게들 애를 안 낳는다며. 아주 못돼 가지고들. 새댁은 애를 갖다니 정말 장하네.”

“예, 고맙습니다.”

이런 어르신에게 ‘여자들이’ 애들 안 낳는다는 사고방식부터 바뀌어야 아이들이 태어날 거라는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거나,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서요.” 같은 최소한의 이유를 첨언해봤자 좋을 일은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정주의 지인들이 보내는 출산 선물을 배달하러 택배 기사가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가 투덜거리는 말 한마디가 날카롭게 정주에게 꽂힌다. 어르신들은 “집에서 노는 여자가 뭘 그리 많이 사들이느냐”며 의아해한다. 커피 한 잔 마시는 데도 온갖 참견을 하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우연히 원두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시는 장면을 보고는 가게 남자 주인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 아니냐며 뒤에서 쑥덕거린다.

 

그 와중에 남편 ‘이완’ 역시 혹독한 시골 생활을 겪고 있다. 동네 유일의 젊은 학교 교사라는 이유로 온갖 행사와 잡일에 불려 다니고 있다. 이런 소규모 지역사회에서는 뭐라도 꾸준히 이벤트를 만들어야 활기를 띠며 살아간다는 것을 정주는 이해한다. 주말이 되자 이완은 교감이 무슨 마을 공공사업 문제로 보자고 했다며 차 키를 집어 든다. 정주는 왜 지역 주민센터 소관의 일인 것만 같은 공공사업에 초등학교 교사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완이 정식 출근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말이다. 한 대 있는 경차는 그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지탱해주기 벅찼다. 이완의 출퇴근에도 사용해야 하지만 정주도 가끔 산부인과에 가거나 장을 볼 때 필요했다. 그가 자질구레한 학교의 일들로 퇴근이 늦어질 때면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사이사이 이완의 직장 동료와 마주쳐 이런저런 대화를 해야 하는 시간은 정주에겐 달갑지 않았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양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관심을 가지는 이 상황이 우리는 왜 불편할까? 낡은 사고방식에 갇힌 사람들 때문일까? 다른 세상을 살아온 집단과 어울린다는 것이 개인 입장에서는 가끔은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그리며, 주변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관심의 정도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정주와 이완의 마음에 공감하는 순간이 많다. 하지만 이 소설의 아이러니한 결말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시골에서 숨 막히게 생활하던 정주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대할 수 있던 구멍가게 주인 최 씨는 정주의 출산을 도와준다. 긴급한 상황에서 작은 여성 병원이 아닌 믿을만한 종합병원에 데려다 준 것을 아주 고맙게 여긴다. 출산을 하고 정주는 더이상 시골에 살 수 없다고 말하며, 잠시 처가에서 지내고자 한다. 불현듯 최 씨가 생각났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며 소설은 끝난다. 최 씨가 고마웠던 이유는 최 씨가 무관심했고, 자신도 최 씨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환멸과 친밀의 양면이 너무나도 싸게 바뀌는 세상에 놓여 있기에 우리는 관심을 두려워한다. 관심이 양날의 검인 반면, 무관심은 몽둥이와 같다. 맞을 때는 아프다 인지하지 못하지만 멍든 가슴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더는 무관심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때로는 부담스러운 관심거리가 될 수 있지만 말이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관심을 가지는 세상은 없어도 된다. 하지만 그런 세상보다는 온 마을이 축복해주는 세상이 좀 더 따뜻하지 않을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