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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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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5,462회 작성일 20-08-0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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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연예인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표현보다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배우들의 캐릭터나 연기가 좋았던 경우는 있었으나 그 경계를 넘어 배우들의 일상과 사생활에 관심이 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그들의 실제 행동인지, 아니면 광고와 같은 이익 추구를 위한 행동인지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특히, 대필과 대작이 많은 지금의 시기에 연예인들의 글이나 작품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러한 내가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를 본 것은 시간이 멈춘 듯한 훈련소의 주말에 시간을 때울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주말 내내 훈련병들은 막사에 있어야만 했고 읽을 만한 책들은 거의 다 읽은 상태였다. 국방부의 시계를 움직일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복도에 있는 책장을 살펴보던 도중에 들어온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시간 때우기 참 좋겠다’였다. 읽는 것밖에 할 수 없었기에 읽을거리가 필요했다.

 

  ‘가벼운 읽을거리’라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글에는 통찰이 있었다. 편견에 사로잡힌 내 불찰이었다. 이 책에는 수년간의 무명 생활을 했던 그의 고뇌가 있었고 솔직함이 있었다. 인내와 고통이 길어졌을 때 가질 수 있는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통찰은 정말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어서, 볼펜으로 메모장에 바른 글씨로 적어 사회에서도 틈틈이 보았다. 그가 나에게 이 책을 통해 주었던 몇 가지 통찰 있는 주제를 소개하여 같이 나누고자 한다.

 

 

 

 

 1. 루틴의 중요성

 

  나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걷다 보면 신발과 양말에 느껴지는 축축함도 비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지만, 그보다도 비가 오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의욕이 사라지면서 우울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짜증을 내지 않아도 될 일에 짜증을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한다. 걱정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들을 걱정하느라,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을 눈앞에 두고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 한 사람의 기분이 다른 사람들의 기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되도록 이런 날에는 내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비치치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렇듯 인간은 기분에 크게 좌지우지되는 동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하지만, 비 오는 날과 맑은 날의 기분의 차이를 보았을 때,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것이 틀림없다. 비 오는 날 뿐만이 아니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거나 아파서 컨디션이 좋지 못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 안에서 생겨난 불쾌한 기분 때문에 하루 전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기란 쉽지 않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p.164

 

  그래서 그가 말한 ‘일상의 닻’이라는 단어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매일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실패를 반복하는 연구자들은 기분에 휩쓸리기 쉽다. 수일에서 수십일동안 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패는 낙담과 좌절로 이어진다. 본인이 진행하는 연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는 불안감도 만만찮다. 이럴 때마다 기분에 휩쓸려가지 않게 잡아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정우에게는 ‘걷기’가 일상의 루틴이었고 걷는 것을 통해 계속 움직일 힘을 얻었다고 한다.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젓지 말고 가만 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중략)

답이 없을 때는 나는 그저 걸었다. 생각이 똑같은 길을 맴돌 때는 두 다리로 걸어나가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p.164

 

  휩쓸려가지 않게 하는 일상의 루틴이 있는가? 힘들다고 이불 속으로 웅크리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매일 꾸준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보자. 무엇이든 상관없다. 작가가 예찬하는 ‘걷기’도 괜찮고 ‘가벼운 운동’도 괜찮다. 헬스장에서 무거운 무게를 드는 것이 힘들다면 헬스장에 갔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괜찮다. 나를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으면 된다.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잠깐 멈추면 다시 뛰기가 힘든 것처럼, 삶도 그렇다. 힘들어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쉬어버리면 다시 일상의 시계를 돌리기에는 만만찮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배우 하정우가 그의 무명 시절의 불안감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일상의 닻’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2. 노력과 방향

 

  <노오력의 배신>이라는 책에서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노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노오오오력’이라는 비판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노력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노력 자체를 아예 하지 않으려는 풍조’가 퍼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의 노력은 그 재능만큼의 큰 성과를 내고, 평범한 사람의 노력은 그 평범한 수준만큼의 성과를 낸다’라는 결론을 지어 노력의 힘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대한 예찬은 지난 2년 동안 한 기업체와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노력을 하면 무조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심히 노력했을 때 가져다주는 실패에 큰 실망과 좌절을 준다는 것을 체험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의 노력은 그 평범한 수준만큼의 성과를 낸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일과 각자의 삶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평범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멋진’ 성과를 내기가 힘들다. 노력한다는 것에는 또 다른 것이 숨겨져 있었다.

 

  보통 ‘노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능한 한 많은 시간과 자원을 들여서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 모습이 상상된다. 하지만 그 노력은 그 방향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노력의 방향과 방법을 아는 감독이었고, 노력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모든 작품에 자신만의 인장을 새겨넣었다 p.282

 

  ‘그 방향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그의 통찰은 정확했다. 노력은 그 크기와 방향으로써 그 밀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노력의 크기가 거대하더라도 그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은 낮은 밀도의 노력이 될 수밖에 없다. 노력의 방향이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노력의 크기가 작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 2년 동안의 프로젝트를 되돌아보았다. 2년 동안 밤낮없이 실험실에서 있었던 것이 과연 높은 밀도의 노력이었는지 생각했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내가 진행했던 방향이 과연 올바른 방향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지 않는지 가늠해본다. (중략)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둘러보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을 수없이 맞게 될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순간에도, 틀림없이 그 최선을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강도와 밀도로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새로운 날들이 기다려진다. p.285

 

  ‘살아가면서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표현을 쓴 작가의 말에 나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실제로 내가 했던 노력의 밀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삶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과나무 아래서 입을 벌리고 하염없이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턱이 아프고 온몸이 저리는 것을 참아가는 것이 올바른 노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보다는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를 어떻게 딸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게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통찰들은 실제로 그가 그동안 무명 배우부터 톱스타가 되기까지 겪었던 일에서 나온 것들이다. 경험은 다른 어떤 배움보다 강한 통찰을 준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했던 고민과 불안함이 어떻게 지금의 하정우를 탄생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경험들은 그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길을 부지런하게 갈 뿐이라는 말에서, 그 내면의 멋짐과 아름다움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이든 더 담담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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