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픽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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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떠한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 내용을 초등학생에 설명 할 수 있어야 한다.’ 라는 말은 남긴 아이슈타인이 보기에는 나는 이 책을 이해했다고 말하긴 힘들 것 이다. 세 번쯤 읽다가 포기한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최근에 본 소설 중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주석이 많은 책은 본적이 없었었다. 주석을 찾다가 본문으로 돌아오면 본문의 내용에 따라 가지 못해 ‘무슨 내용 이였지?’ 하는 불상사가 계속되길 반복 했고 그렇게 두어 번 읽다가 포기한 ‘보르헤스’의 ’픽션들’, 이번에는 주석에 연연하지 말고 본문 자체에 집중해서 읽기로 했고 세 번째 만에 읽은 나에게는 여전히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운 책이다.
이렇게 어렵게 다가온 책이지만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어떠한 연유에서 고전 문학, 인문 40선 중 하나로 뽑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픽션들’은 3차원에서 4차원을 이해하기 위한 초 입방체로 안과 속이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는 병에 물을 담을 수 없다는 클라인 병과 유사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가 허구 속에 현실인가, 현실 속에 허구의 이야기인가 모호해 지는 미로 같은 구성이 작품 ‘픽션들’은 문학과 예술에서 가지는 위치가 이 클라인 병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으며 예술과 문학은 한 단계 더 확장 시킬 수 있는 작품이 이었고, 유럽 전역의 비평가, 작가, 영화감독들이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야기를 뒷받침하지 않나 싶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 부르는 우주가 있다." 라는 문장과 함께 시작한 바벨 도서관이 나는 가장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이 바벨 도서관은 21세기에 와서 인터넷이라는 형태로 완성되어지지 않았나 싶다. 인터넷의 속성은 작가가 소개한 바벨 도서관에 속성들과 거의 일치한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게 올라간 바벨탑과 그 속을 가득 채운 책들. 작가는 이 도서관은 완전하다고 정의함과 동시에 완전함은 결국 불안전함을 야기 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터넷으로 비유해보면 우리는 인터넷을 통하여 수많은 정보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존재하는 다양한 정보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저장되고 공유가 되고 있다. 이 인터넷은 바벨 도서관의 숨표 마침표의 차이마저 다르게 내용이라 생각해 다르게 보존하는 책들처럼 같은 내용이지만 근소한 차이로 다르게 저장돼 있는 인터넷 글을 볼 수 있다. 이 완전한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갖는다. 모든 것이 존재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인터넷의 처음 등장 했을 때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인터넷의 보급은 인류를 긍정적으로 상장 시킬 것이라고. 이 완전해 보인 바벨도서관은 결국 혼돈을 야기 했고, 인터넷 또한 마찬가지로 세상을 이롭게만 만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결국 눈앞의 현실보단 작은 창에 갇혀서 어디가 현실인지 인터넷상 sns 상의 모습이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바벨 도서관, 인터넷 모두 겉보기엔 완벽한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인 인간은 결국 불안전하다. 구조상 완전함에서 야기된 혼돈과 사용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불완전해지고 무엇이 완전함인지 알 수 없어진다는 모순, 사실 완전함을 정의 하는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모순일지도 모른다.
‘픽션들’의 작가 ‘보르헤스’는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라고 서문에 선언처럼 단언한다. 그래서인지 ‘픽션들’은 단편을 묶어 놓은 단편집이다. 그는 살면서 한편의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 ‘픽션들’은 작가의 사상과 의도를 치밀하게 아니 집요 하게 표현해낸 책이다. 이 작품은 ‘대중성을 포기한 예술은 그 작품이 어떠한 가치를 가짐에 불구하고 퇴색되고 잊혀 진다.’ 라고 생각 하던 나에게 조금은 충격적인 작품이다. 아니 대중성과 예술의 관계를 다시 생각 하게끔 만든 작품이다. 현재는 일류 역사에 남은 수많은 지적 활동들은 그 당시 좋은 평을 받지 못한 것도 많고 비참한 삶은 살은 사람도 많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리레이도 그렇고 거친 인상파 화가 반 고흐의 삶이 어떠했는지 보면 그렇다. 이들 뿐이 아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작가들이 예술가들이 대중성을 가지지 못한 작품들을 창조했다. 이러함을 그저 불행으로 치부했던 나에게 ‘본질에 가까운 작품이’라면 결국 남는 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끔 한 작품이다. 나의 부족인지는 잘 몰라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불친절하고 말하는 바도 확실하지 않은 느낌이 드는 모호함을 주체로 한 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읽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작품이 다양한 비평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예술가들에 의한 재생산의 과정에서 대중에게 다양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듦 과 동시에 문학의 수준은 한 단계 격상 시켰다. 이로서 이 작품은 어떠한 위치를 확립 시켰다. 물론 나의 의견이 대중의 의견이라고 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대중성을 반한 작품이 작품의 가치를 이해한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작품은 의미를 가진다. 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는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에 반하는 밀이다. 어쩌면 난 난해한 작품들을 작가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니깐 난해하게 썼다고 은연중에 무시 하고 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조금 대중성이 결여 되면 어떠한가, 그 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본질에 가깝다면, 그 본질에 접근하기 까지 치열함이 묻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다시 회자 되고 인류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물론 이작품은 당시 사회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그런 예가 된다고 하지 못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3번이 시도 끝에 겨우 읽어본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집중해서 읽어 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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