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부족주의 - 에이미 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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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은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소설이다. 저자의 말을 바탕으로 책 소개를 간단하게 하면, ‘일상적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점점 말을 잃어가는 82년생의 대한민국 여성이 겪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많은 여성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반대로 많은 화제와 비판을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하다. 또한,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많은 커플들이 다투고 헤어졌던 원인이기도 하다. 도대체 <82년생 김지영>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호들갑인지 궁금해서 여자친구와 같이 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 나쁘지 않았던 영화 내용과는 다르게, 인터넷상에서 <82년생 김지영>은 뜨거운 감자였다. 이로 인해 남녀갈등은 점점 더 커져 극에 치달았고, 지금까지도 서로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 지금의 남성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진절머리를 느끼며,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와 ‘성차별’에 대해 큰 불만을 느끼고 있다. 이토록 남녀가 분열되고 있으니 결혼과 출산율이 감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현상과 관련된 한 가지 흥미로웠던 설문조사가 있다. 과거에는 청년층이 진보당을, 노년층이 보수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재는 청년층에서 성별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남성은 보수당을, 여성은 진보당을 더 많이 지지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세대갈등, 세대 간의 입장 차는 흔한 것이었지만, 이처럼 성의 차이를 변인으로 사람들의 정치적 태도가 나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설문조사는 이것이 최초이다. 이런 현상은 소위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사회와 사람 내면의 공동체를 파괴해버린 충격적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정체성 정치란 인종, 성별, 종교, 성 정체성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민중의 지지를 호소하고,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하고, 해당 정치성을 가진 이들의 이익과 관점만을 집중적으로 대변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간단히 예를 들어 설명하면,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본인들이 요구하는 여성할당제나 여성가산점, 여성전용좌석 등의 여성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움직임을 뜻한다. 소수 집단이 그동안 외면받았던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근대에 시작된 여권운동이나 흑인인권 및 소수인종 인권을 위한 운동과 같이 이러한 정체성 집단은 그동안 소외당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의 정체성 집단의 행동은 예전의 고귀했던 그들의 행보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본인들이 주류와 거대 권력에 의해 핍박과 착취를 받는다는 명분을 바탕으로 그들의 권익 주장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더욱이 그들은 본인의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닌 다른 집단의 권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런 방식의 극단적 집단의 주장은 대중들의 공감을 사기 힘들다. 최근에 발생했던 BLM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부 대중에게 조롱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흑인들의 인권은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약자 계층인 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인종차별을 한다. 흑인이라는 것을 무기로 폭력과 무력을 일삼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운동은 흑인 인권을 위한 것이라며, 흑인은 그동안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 이러한 무력행사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을 두둔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체성 집단과 정치세력이 결합한다는 것이다. 책 <정치적 부족주의>에서는 이러한 정체성 집단과 정치세력이 결집한 정체성 정치가 사회를 어떻게 분열시키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정치세력은 표를 얻기 위해 각각의 정체성 집단과 결탁하여 권력을 얻는다. 특정한 정체성 집단에게 이익을 더 얹어주고 옹호해주고 방어해주어 결국 한 사회를 정체성 집단이라는 쪼개진 부족 단위로 나누고 갈등하고 권력다툼을 벌인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각 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보기 좋은 명분을 가지지만, 결국은 나라를 조각내어 분열을 조장한다.
정체성 집단의 폐해에 대한 예시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정체성 정치가 극에 달했다. 대한민국의 남녀가 갈등하고, 청년층과 노년층이 갈등하고, 사회 곳곳에서 심각한 균열이 벌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과 균열은 뉴미디어로 인해 심화되었다. 유튜브나 팟캐스트와 같은 뉴미디어를 통해서 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을 골라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확증편향은 심해졌다. 본인이 속한 집단에 도움이 되는 뉴스라면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시청한다. 가짜뉴스와 거짓정보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인해 발생한 여러 사건들(사랑제일교회와 의사협회)도 정체성 집단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현재 전광훈 목사를 필두로 하는 그 교회 집단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도 집단 내부의 목소리만 듣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해당 교회와 같은 많은 종교집단은 해당 교회 목사의 말을 가장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정체성 정치에 휘둘리기 쉽다. 공영방송에서 하는 말들이나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거짓이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들이 코로나 검사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집단에서 그렇게 얘기하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본인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공공의대 확보를 결사반대하는 의협도 마찬가지다. 대중들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본인들의 밥그릇만 챙기려고 하니 대중들이 그들을 지지할 리가 없다. 어떤 뉴스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각자는 각자의 집단에 유리한 정보들만 취사선택하여 인용하고 보도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집단의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 정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현 정부는 본인 정권의 정책의 유효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허황된 통계를 사용하여 대중들을 기만한다. 조국 사태는 어떠한가. 나는 이 사태에 대해서 정부와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왜 조국을 두둔하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와 처가 했던 행동이 불법적이고 아닌 것을 떠나서 조국 본인이 지금까지 했던 말과 실제로 행했던 것이 너무나도 다르지 않은가. 소위 ‘진보지식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이들이 조국을 두둔하는 것을 보고 놀람과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또한, 박원순 성추행 사태는 어떠한가. 아직까지 이에 대한 수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 사태에 대해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단체들은 어떠한 실질적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제발 그들 스스로를 ‘진보’라고 칭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렇듯 민주당과 여성단체의 정치적 결합은 정체성 정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시다.
비단 좌파 정부뿐이겠는가. 극우로 치닫고 있는 미래통합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본인들의 의견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빨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정체성 정치의 일부분이다. 극우가 아니라고 해서 극좌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정말 웃긴 일이 아닌가? 요새 정치판에서 발생하는 사건들과 이와 관련 있는 이익단체의 행동거지를 볼 때마다 답답함을 참을 수 없다. 무릇 세상을 정상적으로 바꾸겠다는 정치를 하려면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보편적 정치를 해야 한다. 보편적 정치는 정체성 정치와 반대에 있는 개념으로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이익을 기대하는 정치다. ‘여성을 위한 나라’, ‘남성을 위한 나라’, ‘노인을 위한 나라’, ‘장애인을 위한 나라’, ‘외노자를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어떤 특정한 집단만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얘기해서도 안 된다. 어떤 특정한 집단에 특혜를 몰아주면, 다른 정체성 집단은 필연적으로 적의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정치란 일종의 제로섬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사회를 관리하겠다는 지도자는 절대 정체성 정치의 언어를 구사해서는 안 된다. 짚신 장수와 나막신 장수 중 누구의 편이 되어서도 안 된다.
물론, 소수 집단의 의견을 무시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농아자분들의 자녀와 어울렸던 경험이 있다. 이 친구들과는 아직까지도 잘 지내고 있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부모님과도 자주 만나고 식사도 가졌기에 자연스럽게 수화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을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그들이 당했던 차별을 직접 목격했고, 그들 본인만큼은 아닐지라도 곁에서 보면서 차별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도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농아인들만을 위한 나라’를 만들자는 주장은 아니다. 농아인들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모든 스피커와 마이크를 버리고 오직 수화로만 대화해야 하는가? 목소리로 하는 대화를 금지시키고 모든 사람이 수화로만 대화를 해야하는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겠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한 집단의 이기적인 주장이 아니라, 대중의 고정관념을 없애는 것과 기술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쉽지 않다. 모두가 각자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어떤 결함이 있는 사람은 그 특정 요인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남들보다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집단을 이루고 목소리를 내는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 주장의 방식이 극단적인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치세력이 그것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다른 어떤 것보다 도덕성과 언행일치가 요구되는 지금의 시대에, 편들어주기식의 정체성 정치는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더이상 존속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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