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페이지 정보

본문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지낸 시절이 있고 그 당시의 기억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내가 처음 조지 오웰을 접한 것은 그의 고향인 영국이 아닌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의 골목인 조지오웰 광장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들린 조지오웰 광장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 조각상이 있었다. 조지오웰 광장에 위치한 거리는 평범한 유럽의 거리 같지만 조지오웰 광장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유독 글 쓰고 있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섞여있는 그런 곳이였다. 조각상 앞에서 일일 가이드가 설명을 해준 내용 중 그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인민정부를 지지하며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의 보호 아래 평등한 분위기가 만연했던 카탈루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라고 한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기억과 함께 어릴 적 인문 40선이라는 이유로 읽었던 동물농장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고 이번에 다시 읽은 동물농장은 생각 보다 파격적이고 당시 냉전 체제 속 소련을 조롱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내전과 스페인에서 경험이 작가에 확실히 영향을 미쳤고 왜 바르셀로나에 조지오웰 광장이 있는지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인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우화의 일종으로 인간에 준수한 사고를 가진 존재들로 나온다. 나이 많은 돼지 메이너는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먹을 것이 풍족하며 비참하게 살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살아 갈 수 있는 동물들의 세계가 올 것이라 생각 하고, 앞으로 동물 농장의 근간이 될 사상을 전파 한다. 그렇게 매너 씨, 소설 속 농장의 인간주인의 농장은 정복되고 그들을 통솔하던 스노우라는 돼지 아래 동물들이 지배하는 농장 동물농장을 만든다. 고무적인 일이다. 그들은 체계적인 제도와 설비를 가추며 발전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노우와 함께하던 나폴레옹이 스노우볼 체제를 비난하며 반역을 일으킨다. 스노우볼은 반역자로 쫓겨나며 나폴레옹의 폭정이 이어져 간다.
다시 읽은 이 소설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3가지 정도 인 것 같다. 농장의 명칭이 매너농장에서 동물 농장으로 그 다음 다시 매너농장으로 바꾸는 과정과 동물들의 지배가 바뀜에 동물들의 태도변화 그리고 마지막 장면인 누가 돼지이고 누가 사람인지 동물들이 구분을 못하는 장면이다. 동물들은 농장의 인간주인 매너 씨를 몰아내고 그들이 처음 농장을 운영해 나아갈 때 외부 사람들은 그 농장을 매너 농장이라 부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우수한 생산량과 인간의 습격을 이겨냈을 때부턴 동물농장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이는 인간들의 경의가 담긴 표현일 것이다. 인간의 소유물로만 여기던 농장의 주인을 동물들로 인정한 것이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나폴레옹 그들의 지위를 포기한다. 그는 동물농장의 지위를 버리고 다시 매너농장으로 회기 한다. 그들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동물의 품위를 포기한다. 어찌 보면 어리석은 지도자와 우둔한 피지배자가 만든 필연일 수 있다.
사실 동물들은 상황이 바뀜에 그들의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의 태도가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스노우볼이 농장을 탈환하며 그들의 농장을 새울 때일 것이다. 그 외는 사실 그들은 크게 삶의 태도나 가치관을 바꾸지 못한다. 인간의 손길을 좋아하느니 차라리 지배받는 삶이 편하다 생각한 몰리는 동물농장을 이루었지만 떠났고 또 당나귀 벤자민은 누가 지배를 하든지 크게 상황은 우리의 삶은 바꾸지 않는다는 염세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 나머지 동물들은 그때의 상황에 그저 순응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 외 동물들은 스노우에 의하여 계몽 되었지만 나폴레옹이 반역을 성공한 것을 보면 그렇게 성공적인 계몽과 주인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진 않다.
소설 마지막 부분 돼지 나폴레옹 돼지의 이득과 굳건한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인간과 거래를 하며 엄격한 지배 구조를 만들어 피지배 동물을 착취한다. 이에 피지배 동물들은 두려움에 감히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하지만 돼지들이 인간들과 매너 씨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이러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매너씨의 집을 엿본다. 그곳에서는 인간과 돼지들의 싸움이 일어나고 그들이 엉겨 붙자, 동물들은 누가 돼지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다 결국 돼지들은 동물들이 혐오하며 몰아내고자 했던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이러한 추악한 지도자들을 돼지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당나귀의 삶의 태도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상황이 변하든 누가 자신들을 통치하든 담담하다. 결국 개인의 삶은 변하지 않을 꺼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굉장히 염세주의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우리는 결국 소시민이다. 사실 격동의 시기에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소설 속 스노우볼처럼 훌륭한 지도자로 될 수도 나폴레옹처럼 포악한 통치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은 소시민이다. 그렇담 상황의 변화에도 거친 시련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담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당나귀처럼 포기에서 나오는 담담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담담함이 아닌 자신의 강한 가치관에서 기인한 담담함을 말하고 싶다. 세상의 시련 속에서 자신이 쓰러지지 않게 지켜주는 것은 결국 남이 아닌 자신이며 자신의 강한 가치관에서 나온다 생각한다. 비가 내리면 비가 온다고 혼비백산하며 피하는 것도 그저 비를 가만히 서서 맞는 것도 아닌 어쩌면 인생은 시련이란 비속에서 신나게 춤추며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일지 모른다.
- 이전글교만을 극복하기 - 플로이드 맥클랑 20.09.04
- 다음글힐빌리의 노래 - J.D.밴스 20.09.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