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이방인 - 알베르 카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성호
댓글 0건 조회 6,474회 작성일 20-07-13 17:02

본문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는 허무주의, 또는 니힐리즘 철학을 관통하는 대사가 나온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절대적인 가치 및 권위를 상징하는 신을 부정함으로서 인간을 전통적인 관념과 체제로부터 자유롭게 하겠다는 니체의 선언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고, 이러한 허무주의 철학은 현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도 큰 영향을 남기고 있다. 허무주의는 크게 능동적 허무주의와 수동적 허무주의로 나눌 수 있으며, 우리가 보통 허무주의라고 생각하는 철학은 후자에 가깝다. 권위주의를 통해 정의된 절대 가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절대 가치를 찾아가겠다는 자세를 가진 능동적 허무주의에 비해, 수동적 허무주의는 절대적 가치를 부정함을 넘어 포기하고,  현실을 비관하는 염세주의의 형태나, 심지어는 당장의 욕구만을 쫒아 살아가는 쾌락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우리나라 사회와 문화 속에 담겨진 대학민국 국민들의 철학과 사상은 허무주의 중에서도 수동적 허무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정치, 종교, 경제 등에 비관적인 시각을 넘어 포기해버린 사람들. 연애 결혼 육아 등을 포기해버린 N포 세대 청년들. 버는 소득을 족족 소비로 전환하며 인생을 즐기겠다는 YOLO족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나라 사회에는 허무주의가 팽배해있다. 계층 상승의 기회를 포기하며 나온 '흙수저'나 한국의 현실을 지옥에 비견하는 '헬조선', 주어진 인생에 희망이 없다는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준말) 등, 젊은 계층에 널리 통용되는 단어들만을 보아도 이러한 세태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이토록 꿈과 희망을 잃고 허무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일까?


  이방인은 현대인의 소극적 허무주의와 고립을 관통하는 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비통해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장례를 치른다. 바로 다음날 뫼르소는 아무렇지 않게 여자친구 마리와 하루를 보내고, 이웃이던 레몽과 친구가 된다. 레몽은 뫼르소에게 자신의 아랍인 애인이 자신을 이용해 먹었다며 복수할 수 있게 거짓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였고, 뫼르소는 전혀 개의치 않고 편지를 써 준다. 도움을 받은 후, 뫼르소를 좋아하게 된 레몽은 뫼르소와 마리를 자기 친구가 사는 해변가로 초대한다. 하지만 레몽을 미행하던 레몽의 옛 애인의 오빠와 그의 아랍인 무리와 마주치게 되고, 레몽은 그들에게 칼에 찔려 크게 다치게 된다. 사건이 끝난 후 답답해진 뫼르소는 레몽에게 권총을 빌리고, 해변가로 산책을 가던 중 아랍인 무리와 만나게 된다. 긴장감이 도는 상황에서 강렬한 햇빛에 정신이 혼미해진 뫼르소는 실수로 아랍인 한명을 권총으로 쏴 죽이게 된다. 살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중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를 무감정하게 치룬 후 놀러갔다는 점이 재판의 쟁점이 된다. 더욱이 뫼르소가 상황에 대한 설명없이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증언하자 재판은 뫼르소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뫼르소는 별 관심없이 재판을 구경하며 자기 변호를 하지 않고, 결국 뫼르소는 무자비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사형을 앞 둔 뫼르소에게 신부가 찾아와 신앙을 권유하지만 뫼르소는 죽음과 무지 앞에서의 삶을 의미를 말하며 거부하고 사형을 맞이한다.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는 소극적 허무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신성하거나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 폭력적인 복수를 도와주는 행동, 살인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모습은 뫼르소가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뫼르소에게는 그의 선청적인 특성과 관계없이 사회의 윤리와 가정에 대한 가치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뫼르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분 뿐이다. 뫼르소가 장례 후 여자친구와 놀러 간 것도, 그리 친하지도 않은 레몽을 도와준 것도, 살인을 저지른 것마저 어떠한 가치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당시에 기분에 맞춰 행동한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허무주의 철학은 뫼르소를 비사회적으로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지만 동시에 고통을 이겨내는 힘을 준다.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사람 앞에서는 성욕, 식욕과 같은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욕구 외에는 추구해야만 할 것이 없다. 그러기에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죽음을 눈 앞에 뒀을 때도 무관심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 처했든 그에게는 모든 것이 무의미 했고 당장의 욕구만 충족된다면 일상과 별 차이가 없었다. 허무주의는 뫼르소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기에 그는 죽을 때까지 허무주의를 버릴 필요가 없었다.


  소극적 허무주의는 마치 지하 벙커와도 같다. 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인생에 대한 고민 없이, 즉각즉각 떠오르는 생각과 느껴지는 본능으로 살아가는 삶만큼 생각없고 편한 삶이 있겠는가? 그러나 지하 벙커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고, 언젠가는 지상으로 올라와야 한다. 개인적으로 뫼르소의 삶과 그 결말은 비극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뫼르소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의미와 감정을 싣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공허하고, 그의 삶은 너무도 무가치해 보인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뫼르소와 같이 허무주의가 소극적인 형태로 발현되는 것을 경계했다. 오히려 사회와 관습에 의해 틀에 밖혀있는 절대 가치를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스스로 고민하고 찾아가는, 일명 '초인'이 되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개신교를 믿는 종교인으로서 나는 절대 가치의 존재를 믿고, 신의 존재를 받아드렸다. 하지만 허무주의에 대한 니체의 철학 속에서 배울 점이 있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도 소극적 허무주의가 가미된 종교인들을 쉽게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대다수의 종교는 세상을 더 도덕적이고 가치있는 곳으로 만들고자하는 소망이 있다 (혹은 있다고 알고 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화합하는 일명 '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비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소망을 이미 포기했거나, 애초에 가져본 적도 없는 듯하다. 물론 욕심 많은 인간 군상 가운데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참 어렵고, 교회 안에서 인간관계에서 다투고 상처를 받다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절대 가치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의문을 덮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문을 가지고 씨름하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미 더이상 고민하기를 포기한 듯하고, 하나님의 소망과 꿈을 잊고 그저 하루 벌어 먹고 사는 것을 위해, 혹은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절대 가치를 말하지만, 실상은 신적인 존재를 이용해 본인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어쩌만 그들의 마음 속에 신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맞을까조차도 의문이 든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소극적 허무주의에 빠져있다. 하지만 그들이 원래부터 허무주의자들이었던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도 모두 꿈이 있었고, 희망찬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마음을 불길을 꺼트렸고, 청년들은 실망과 좌절을 넘어 결국 포기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싶다. 공정한 경쟁으로 수험을 준비하던 10대들에게 정치인 자녀들의 부정입학과 거짓 논문들은 얼마나 큰 실망을 주었을까? 취업란 가운데 열심히 취업을 준비하던 20대 취준생들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으로 단체로 전환되는 모습은 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까? 결혼을 꿈꾸며 돈을 모으는 30대에게 끝없이 오르는 집값은 얼마나 큰 두려움을 주고, 남녀에게 주어진 사회적 눈초리는 또 얼마나 무겁게 다가왔을까? 나는 사회가 더이상 청년들이 소극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상처를 그만 주었으면 좋겠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누군가의 약속이, 그 당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손에서는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