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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아는 척하기 - 리처드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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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787회 작성일 20-05-0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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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아는 척하기" - 리처드 오스본


이규섭 


 전시관의 첫 경험이 다들 어떠한지 모르겠다. 내 결론은 전시의 목적은 몰랐던 것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공부를 해야지, 실물을 본다고 해서 모르던 걸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 와서 전시관의 의미가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들 하지만 요즘 같이 고화질의 영상, 사진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 실체를 조금 가까이서 본다 하여 얼마나 차이가 날 것인가? 그러니 전시는 단순히 아는 것 너머의 것을 느끼기 위한 것, 이미 아는 사람들을 위한 향유의 공간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향유를 위해 또 공부를 해야한다면 누가 그것을 즐거워할까? 전시가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전시의 이런 역설적인 측면은 미술관 관람을 할 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그림, 조형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거기서 100년 전으로 한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너무나 단조로운 일상의 모습이 자리한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은 그 어느 시대의 인간보다 미술과 친숙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술관에 가면 그런 친숙함에서 오는 시각적 즐거움 이외의 모든 경험은 놓치고 있다는 불안함이 우리를 감싸고, 그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그저 점과 선과 면과 그리고 색으로 이루어진 액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게 된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르는게 있으면 공부를 해야지.

 교양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알면 멋지지만 딱히 쓸모는 없는 것들은 ‘아는 척’ 하기 딱 좋은 것들이며, 그렇기에 제대로 알려고 하는 사람보다는 ‘아는 척’ 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더 쉽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나도 아는 척을 해봐야지.’하는 얄팍한 심산으로 딱 그런 책을 골라 들었다. ‘아는 척’에 229페이지나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읽기를 멈추어야 했다는 생각이 이제와 든다.


 모든 학문의 시작이 그러하 듯.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답을 짚고 넘어가야이 미지의 여행을 출발할 수 있다. 동시에 늘 그렇듯이 이런 원초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고, 대신 미술 이론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이 여정을 시작한다. 작가는 책의 서두에 이를 "삶의 질을 높이거나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해 보다 나은 느낌을 얻도록 해주는, 신성하고 아름답고 의미있는 대상들을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왜 만들려고 하는지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임시로 정의하였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해가는 말들이지만 종합하자면 그래서 그게 뭔지 알기 어려운. 딱 미술관 같은 느낌의 정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아는 미술의 이미지는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면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미술 작품들이 존재했다. 미술 작품은 다른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이 그 시대의 철학, 사상에 영향을 받는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부분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있어왔던 미술은 매 시대에 따라 그 시대의 특징를 반영하거나, 시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해 왔다. 실제로 근대 이전의 미술은 그러한 맥락으로 소개되어 왔으며, 우리 역시 그러한 방식의 미술사에 익숙하다. 낭만주의는 경험을 중시하는 계몽주의가 자리잡은 이후 이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개념으로, 경험적으로 규정된 계몽세계에서는 인간의 창조성과 자유를 위한 여지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자아와 상상력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우리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고, 문화적으로 형성된 관점에 따라 사물을 보게 된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예술가의 느낌과 감정을 예술적 표현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 시대에 형성된 예술가의 특징은 비합리적인것, 주관적인것, 영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자유로움과 이를 통해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천재성, 주류사회와 동떨어진, 고통이 수반되는 창작의 과정 등을 포함한다. 대중이 상상하는 예술가의 원형은 아직도 낭만주의 시대(18~19세기)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현대 미술은 난해해서 싫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책의 초반부다. 태동하기 시작한 예술은 체계화의 과정을 거치기도, 그렇기에 동시에 그 체계를 피해 다른 모험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책의 내용을 옮기기 위한 글이 아니니 미술사를 거쳐간 수많은 사상과 그 결과물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너무 많아서 이 짧은 글에 하나씩 언급할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미술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미술사를 거쳐온 다양한 철학을 다루어야 한다. 모든 미술가들은 결국 철학자이고, 다만 그것을 미술의 형태로 주장하였다는 점이 달랐다. 그 철학은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미술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무엇이 미술인가? 무엇이 미술 이론인가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작품의 형태로 내놓고, 또 그것을 보강하고, 혹은 이에 대답하고, 반박하기 위한 작업이 이어졌다. 미술을 정의하기 위해 작품들이 나오고, 그 작품들을 돌아보며 미술을 재정의하는 재귀적인 구조가 머리를 마비시키기 시작한다.

 사실주의니 인상주의니 상징주의니 하는 우리에게 이름이나마 친숙한 기조의 작품들이 태동하고, 입체파와 표현주의를 거쳐, 모던 아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모던 아트는 수많은 미술가들의 등장과 급진적인 사회의 변화 속에서 수많은 과정과 갈래를 통해 뻗어나가며 온갖 형태의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대중 문화와 결부되기도 하고, 기술에 대한 반발을 보이거나 때로는 적극적인 결합을 시도하기도 하며, 미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기도 했다. 미술이 미술로써 존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뇌가 담긴 시도들과 그에 대한 또 다른 도전들이 나오기도 하고, 미술 작품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따라서 결국 작품 속에 담긴 메시지, 혹은 그 작품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메시지, 그 의의들은 이러한 일련의 흐름 위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짤막한 오디오 클립이나, 한시간 남짓한 도슨트의 설명으로는 전해질리가.


 현대 미술을 보고 우리는 ‘도화지에 점 하나 찍은 것’ 따위로 여기고는 한다. 그래서 때로는 ‘누가 그렸는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결론 짓기도 한다. 현대 미술의 가치는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금전적인 가치와 연결되어 있어 이러한 평가를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미술작품의 의의가 다른 관점에서 보이게 될 것이고, 그렇기에 현대미술에 대한 조롱은 “맞는 말인 동시에,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된다.

 말 그대로 겉만 핥은 ‘아는 척’을 위한 분량만으로도 머리가 뒤죽박죽 정신이 없다. 무슨무슨 주의니 누가 그린 무슨 작품이니를 달달 외운다면 (물론 실패했다.) 그 아는 척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꽉 찬 머릿속에 비해 그 속이 얼마나 공허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적인 내용과 결부되어 있는 미술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여정이었다. 그러니 교양을 쌓는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교훈을 새삼 느끼면서, 허술하게 지어 올려놓은 미술사 지식의 골격에 앞으로 조금씩 보강재를 덧대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뒤샹 이후의 예술가들의 가치는 그들이 예술의 본질에 얼마나 의문을 품었는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 조셉 코수스

“The 'value' of particular artists after Duchamp can be weighed according to how much they questioned the nature of art.”

― Joseph Kosuth, Art After Philosophy and After: Collected Writings, 1966-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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