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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근거를 타인에게서 찾는 많은 현대인들의 자화상 - 불면 클리닉, 황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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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6,029회 작성일 20-04-0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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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 클리닉”. 짬을 내어 학교 도서관을 돌아다니다가 제목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온 책이다. 아마도 이 글을 쓰는 나부터가, 학부 시절 시작된 오랜 불면증으로 고생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잠을 자려고 누울 때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와서 괴롭히곤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은 보통, 생활하는 동안 한없이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낀 날이기도 했다. 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죽어라 공부하고, 또 아르바이트에 임하고 있는가. 언젠가 올 (거라고 믿고 있는) 더 나은, 더 행복한 날을 위해서?

 

“늘 세상과는 한 발 동떨어져서 살았다. 그게 안분지족에서가 아니라 천성이 게을러서임을 나는 안다. 나는 애초부터 그들의 속도에 맞출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방향을 틀고 소설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게 때로는 팔자 좋은 사람이란 오해도 낳았다. 관계를 맺지 않고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나는 절대로 팔자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늘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산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공허함’이란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제는 친구를 넘어서 가족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사람들은 나중에 올 행복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게 행복을 뒤로 미루는 걸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무슨 목표를 좇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다 그 목표의 대상이 ‘사람’이 되어버리면 더 골치 아파진다. 자의든 타의든 계속해서 남과 비교하고 (혹은 그러기를 강요당하고), 자기보다 훨씬 잘난 사람을 보고 자존감은 더 추락하다가 결국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절망한다.

 

“그녀가 나타나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에겐 나보다 그녀가 더 잘 어울렸다. 봄인데, 나는 아직 솜이 들어간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 나의 잿빛 외투가 그녀의 화사한 가디건과 너무 대비되었다. (...) 나에겐 쉰 살이 훨씬 넘은 K(‘나’와는 애매한 관계에 있는 남성인데, 굳이 표현하면 ‘quasi-연인’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가 어울린다. 그게 내가 처한 현실이다.” - 본문 중

 

이 소설을 쓴 장혜련 작가 역시 그런 사람이다. 각박한 세상에 맞추어나갈 자신이 없어서 늘 자신을 한 걸음 뒤에 놓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는 박탈감과 공허함을 소설로 풀어내는, 소설이 곧 자신의 마음을 터놓는 창구와도 같은 셈이다. 소설 <불면 클리닉>에서도 이러한 감정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주인공인 ‘나’는 독신의 중년 여성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외롭고, 가진 것 없고,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자학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계속해서 비교한다. 한편으로는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보면서 그나마 자신은 좀 낫다고 위안삼으려고 한다. 물론 전혀 건강하지 못한 생각이다. 계속되는 불면증세에 결국 클리닉을 찾았지만, 거기서도 남자 의사와 여성 견습생 사이의 환한 분위기를 보면서 자신을 괴롭힌다.

 

“여자가 죽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나는 왠지 당한 느낌이 들었다. (..) 나는 여자의 죽음에서 위안을 얻으려 했던 것 같았다. 비록 돈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암에 걸리고, 잠도 못 자지만 여자만큼 나쁘진 않다고, 그러니 아직은 살 만하다고.” - 본문 중

 

살아야 할 이유가 현재에 없는 삶은 공허하다. 사람이 공허해지면 삶의 의미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게 되고, 필연적으로 점차 자기 파괴적으로 변해간다. 자기 파괴적인 사람은 결국 주변 사람들도 파괴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공상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는 현실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 역시 내면에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열등감과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리고 인용한 문장처럼 이웃집의 어느 이름 모를 여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에 은근히 아쉬움을 느끼는, 밖에 감히 드러낼 수 없을 듯한 생각을 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주인공과 파괴적인 정도만 다를 뿐이었다. 주변에 돌아보는 것에 서툴렀다. 어떻게든 성공하고,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현실의 나를 학대하는 것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그나마 하느님께 감사한 것은, 내 주변에 는 그런 나를 감싸주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고 지켜봐 주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한때 인터넷에서 ‘YOLO (You only live once)’,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퍼졌던 때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싸구려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뻔하디 뻔한 말이고 현실 감각이 없는 이야기라는 비판도 많이 들려왔다. 그러나 현실 감각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한 번 사는 인생,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허한 행복이 아닌, 건강한 행복을 느끼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여. 가끔이라도 좋으니 영적(?)인 연습을 좀 해보자. 뒤쳐져도 괜찮다고.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라고. 비록 세상은 끊임없이 그대들을 속일지라도 그렇게 믿는 걸 연습해보자. 아침에 일어나서 쬐는 햇살 한 줄기에, 어느 휴일 오전에 이불 안에서 까먹는 귤 하나에,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때 아직 휴일이 한참 더 남았다는 것을 아는 것에, 소소한 것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해보자. 당신도 모르게 당신 안에서 영겁의 시간동안 울고 있었을, 당신이 외면하고 있었던 당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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