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태치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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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살다 보면 먼저 걸어온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할 때가 있다. 그 길이 인생의 한 갈래일 때가 사람이 처음으로 ‘선생’으로서의 부담감을 맞이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조각이 다른 조각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조금의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버려지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그러한 거리감에 익숙지 않은 어린 영혼들에게 다시금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교사의 업이라면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주인공 헨리는 유능한 교사다. 비록 개인적인 문제로 계속 학교를 전전하는 시간제 강사이지만, 그는 새로 옮긴 문제아가 가득한 학교에서도 전문적으로 그러나 합리적으로 아이들을 대하면서 아이들에게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가슴 깊이 묻어 놓았을, 그 툭 튀어나온 결함은 자꾸만 폐부를 찌른다. 자신의 출생과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치매에 걸린 조부와 그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까지. 모든 것들이 삶을 우울함에 잠식되게 만든다. 그는 현실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두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이른 나이에 우울에 잠식되어버린, 자신과 닮은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매정할 수 없었다.
헨리는 작중에서 두 명의 소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한 명은 가출 소녀 에리카, 다른 한 명은 반에서 왕따를 당하던 메레디스. 둘은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영역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고, 헨리는 마지못해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에리카와 함께 지내면서 성매매에서 벗어나 나이에 맞는 삶, 가족이 있는 삶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다.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외모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메레디스에게는 진정한 이해자로써,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있게 돕는다.
허나 사회가 남긴 상처는 단순하지 않아서, 한 사람의 힘으로는 되돌리기 힘들다.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삶은 오히려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 구원받았을 때, 의존적으로 만든다. 사회에 버림받은 어린 영혼들은 헨리라는 구원의 끈을 놓지 못하고 점점 집착하게 된다. 자신의 삶과 업을 구분 짓고 타인과의 거리를 명확히 하면서 완벽한 거리감을 유지하던 헨리는 두 소녀로 인해 그 거리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메레디스는 헨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고, 점차 감정이 왜곡되어 간다. 어쩌면 필연일지 모르는 비극을 향해 열차는 달려만 간다.
당황한 헨리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이미 모든 것들은 엉키어 버리고 난 뒤. 소녀의 고백에 언제나처럼 완곡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거리를 두고 만다. 메레디스는 결국 삶의 유일한 이해자라 여겼던 헨리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헨리는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고민하다, 에리카를 자신에게서 떼어 놓기로 결정한다. 울부짖는 에리카를 보호시설로 보내는 그의 모습과 함께 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매정하지 못하고 자꾸만 결단을 회피해 왔던 헨리의 탓일까? 아니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어린 소녀들의 탓일까? 그렇다면 헨리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소녀들을 보고 모른 척 했어야 했던 것일까? 아이들을 돕겠다는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던 개인적인 욕망을 담았던 것에 대한 벌인 것일까?
탈선해버린 아이들,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부모, 항의 전화로 가득 찬 일상. 그 안에서 바른길을 되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화는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이들 앞에서 익살꾼인 선생은 약물에 의지하고, 학생들에게 갖은 협박을 받음에도 명랑하게 웃는 낯으로 대하는 선생님은 사실 우울증세에 시달린다. 아이들의 무시에 자신도 무시로 대응하며 기계적으로 주어진 업무만을 수행하는 선생은 가정에서도 소외되어 고독한 삶을 이어나간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타인으로부터의 무심함 때문이고, 타인에 대한 무심함 때문이기도 하며, 그 무심함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수많은 무심함 속에서도 사실은 조금 남아있을 인간적인 가치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이러한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배움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선생일 것이다.
하지만 진심을 다하는 가르침의 과정은 우리의 결함까지도 동시에 드러낸다. 우리는 이 사실을 늘 간과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완벽한 인간이 다른 이에게 선심을 쓰는 것이 가르침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숨기려 들거나, 외면하거나, 아니면 권위로 짓누르면서 완벽한 이로써 존재하려는 행위 자체를 ‘가르침’으로 여기게 되는 데 익숙해졌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 사실에 모순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차례가 되면 어느새 그것을 흉내 내고 있곤 했다.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은 수치심과 고통을 수반하는 길이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그럴듯한 대안을 찾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심술쟁이라 어떤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해서, 때때로 나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에 직면한 이들에게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조각을 건네받는 것으로 성장하는 것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할 때 그 틈 너머의 것을 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결함을 안고 사는 모순덩어리의 존재들이지만, 그것이 가르침을 주고 배움을 얻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다. 부끄러워야 할 것에 뻔뻔할 것 없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진심을 다해서. 내가 그렇게 배움을 얻어왔 듯이, 그렇기에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영화 전반을 누르는 깊은 우울의 감정 속에서, 희망하나 없는 결말에 짙은 우울함으로 젖은 헨리의 눈빛 속에서도, 어렴풋이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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