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진 곳 – 장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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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곳 – 장은진
이규섭
고난이 인간을 성장하게 만든다는 말은. 인간이 고난에서 벗어난 다음에나 비로소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잔인하다. 고난은,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던, 그전까지 꾸준하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그 삶을 각박하게 만든다. 고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후의 삶을 상상하기 어려워지고, 어느새 지독하리만치 팍팍한 삶에 익숙해진다.
슬프게도 고난의 가장 깊은 골에 빠진 사람들은 사회의 시야 밖에 있다. 그런 이들의 삶이란 우리가 진정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 덜 힘든 사람들이다. 정말 힘든 사람들의 눈에 우리는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을 뿐이다. 사기를 당해 집세가 싼 곳으로 쫓겨나듯 이사 온 주인공 자매가 신세 한탄을 하는 집주인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아무리 그래봤자 세입자에게 그들은 집주인이고, 월세가 하루만 늦어도 방문을 두드릴 것이므로.
군중의 중심에는 누가 누리고 있을지 모를 ‘보통의 삶’이 자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그곳에 발 하나쯤은 걸쳐놓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은 일종의 압박감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조금씩 밀어내는 압박. 슬픈 건 고난이 또 다른 고난을 낳으면서 그 가운데 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밀려나며 바깥으로, 바깥으로, 그렇게 점차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외진 곳으로 밀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삶은 현실의 벽 앞에 고전하는 현대인들의 투덜거림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한다.
젊음도 없고, 옆 사람과 그 사람의 말조차 없다면 감내하는 것뿐이었다. …중략… 네모집의 세입자들이 고요하게 보이는 건 실패와 좌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내하고 있어서였다. 어떤 곳보다 더 많은 절망을 품고 사는 데가 여길지도 모르니 어쩌면 죽기살기로 버티고 있을지도.
그래도 가끔은 시련이 밖으로 드러날 때가 있었다. 투명 유리 때문이 아니라 소리 때문에. … 중략… 방에 가만이 앉아서도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말리거나 소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 방문을 열거 나가는 세입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에게 익숙한 문제이지만 그들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중략… 저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 자신들의 오래된 시련을 떠올리며. …
소설 속 네모 집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지 않는다. 다들 주인공처럼 떠밀리고 떠밀려서 온 곳이다. 그만큼 싸고 그만큼 허름한 이곳. 주인공은 이곳이 마친 여관방 같다고 느낀다. 이곳에 눌러앉으려는 사람은 없다. 잠시 버텨가는 곳. 다시 달려 나가기 위해 엉덩이를 반만 붙이고 사는 이들은 서로에게 깊이 정을 주려 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어쩌면 서로의 상황을 잘 이해하기에 그것을 일종의 배려라고 여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난이 괴로운 것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끝에 희망이 있더라도,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지 모르기에. 조금씩 두려움에 잠식된 마음은 사실 이 고난에 끝이란 없는 게 아닌가 의심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의 끝이 다가오면 무언가 결말이 있기를 기대하듯이, 우리도 삶의 어떤 순간에는 고난이 끝나기를 막연히 기대한다. 남의 일에는 한없이 논리적이면서도, 자신의 감정엔 그 과정을 쉬이 생략하는 게 우리의 마음 아니던가. 임용고시 합격자 발표날이었다. “우린 아직 젊잖아.” 라는 동생의 한 마디 위로. 주인공은 탈락했고, 불운은 우연히 다가오지만 고난은 우연한 일로 끝나지 않는다.
아직 젊어 만만하게 보고 실패와 좌절이 이토록 자주 찾아오는 걸까. 젊음과 청춘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약이라면 젊지 않은 나이에 실패와 좌절이 찾아오면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떤 핑계를 대서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될까. 나는 미래에 준비되어 있을 무수한 절망들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까지 앞서 생각하다 불현듯 두려워지고 말았다.
집세가 제일 싸서 2년이나 살고 있다던 3호실 여인은 마지막 날 밤, 자신에게 집착하는 전 남자친구를 피해 주인공 네 방으로 숨어든다. 이 가난한 독신 여성의 삶은 고난이 인간을 괴롭게 하기 위해 얼마나 다채롭게 혼합된 덫인지 보여준다. 하나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하나를 덤으로 얹어준다. 여인은 다음날 자취를 감췄다. 분명 더 외진 곳으로. 현실은 그런 것이다.
‘때로 누군가에게 그저 “잘했어.”라는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막상 그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무엇을 ‘잘’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행동이 우스꽝스럽고 엉망이란 걸 알면서도 그것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울고, 소리치고, 욕지거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기댈 구석이 없을 때, 그때 모르는 척 멍청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자신의 엉망진창인 마지막 발악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잘했어.”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언니는 편의점주에게 욕을 퍼붓고 돌아온 동생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동생은 울고 싶을 때 욕을 하는 습관이 있다고. 그러니 아는 욕을 다 했다는 건 그만큼 울고 싶은 날이었다는 뜻이라 해석하면서.
힘든 사람에게는 똑같이 힘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게 될 때가 있다. 이 비효율적인 인간의 마음을 마냥 추악한 본성이라 말하는 건 가혹한 게 아닐까. 아픈 이의 마음은 비참하고 역겨운 형태로 표출된 인간애다. 주인공은 네모 집 아홉 개 방에 불이 몇 개 켜져 있는지를 보며 안도한다. 방에 불이 켜진 개수만큼 내가 가진 의문에 같은 답을 들려준다고 여기며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동생이 내 두려움을 듣고 있다 대답했다.
“그땐 연륜이란 게 생기지 않을까. 삶의 연륜”
…중략…
“나무의 나이테처럼 나이를 먹으면 삶에 그려지는 무늬들.”
…중략…
동생의 삶 어딘가에 내게 없는 어떤 무늬가 그려져 있을 것 같았다. 언제, 무슨 일을 겪어서 얻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아서 어려울 때마다 드러나는 무늬. 좌절을 이겨내게 해주는 건 옆 사람과 그 사람이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는 걸 오늘 밤 나는 알게 되었다. …중략… 무늬란 다른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대신 말의 형태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갖게 된 무늬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쓰게 된다.’
고난이 인간을 성장하게 한다는 말은 고난이 반드시 끝나리라는 근거없는 약속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고난을 달게 받으라는 가혹행위여서도 안된다. 고난속에서도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늬를 하나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나이테처럼 한 겹 성장하게 되는 것은 외면으로 표출되는 성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내 상처, 고난이 새겨진 나의 이야기는 평소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도, 역시 고통받는 다른 이를 만났을 때 그 몸이 스러지지 않도록 버티어 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른 이가 나를 살아가게하고, 내가 다른 이를 살아가게하고, 그렇게 우리가 고난 속에서 살아갈 이유가 생겨난다.
다시, 이야기가 끝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집에 가까워 질수록 빛이 줄어들고 어둠은 짙어져 갔다.
아픈 이들은 쉴 곳조차 편안하지 못하다. 여전히 어둡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엉덩이를 반쯤 뗀 채로 살아가는 곳. 그 불안하고 불확실한 삶을 유지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집들이 있었고, 사람이 살았으며,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집을 옮긴 후 내 몸에도 무늬 하나가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말의 형태로 드러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게 될 무늬라고 생각하자 걸음은 더 빨라졌다.
…중략…
동생이 가고나면 나는 더 자주 저 네모난 불의 개수를 세면 지내게 될 것이다. 그때, 등 뒤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혼잣말인 듯한 작고 부드러운 말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동생이 일본으로 떠나기로 정한 날, 평소 어색하게 지나치던 5호실 남자가 인사를 한다. 한 사람이 떠나가니 또 다른 사람이 다가온다. 해피엔딩은 없고 모든 인생이 영웅담일 수 없지만 그래도 어디에나 사람은 살아가고 있다. 떠나간 이의 자리를 새로운 이가 채우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유대가, 그 관계가 끝없는 고난에 끝이 있다는 근거 없는 신념을 유지하게 해준다. 각자의 무늬로 서로에게 없는 무늬를 보듬어 주면서 그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 외진 곳에서도 삶이 존재하게 된다.
모두가 중심에서 살아가고 싶어 한다. 당연한 걸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삶을 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중심이 필연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우리 삶에는 큰 어려움이 끊임없이 닥쳐온다. 그렇게 조금씩 삶이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을 느낄 때, 외진 곳에도 삶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손에 손을 잡고 또 견뎌야지. 두려움이 우리를 덮치고, 논리적인 사고가 마비되는 시간. 그 때야 말로 드러나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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