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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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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훈
댓글 0건 조회 544회 작성일 26-02-23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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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



 보통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으레 이런말을 듣기 마련이다.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이다.', '긍정적으로 사고해라.'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등등의 인간의 의지와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 말이다. 그런데 여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수용소에서 실제로 이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체계화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빈 의과대학 출신의 정신과 전문의 빅터 프랭클이다. 그리고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1944년 당시 나치의 수용소에 붙잡혀서 산전수전을 겪은 빅터 프랭클이 엮어낸, 삶의 태도가 우리의 인생과 생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빅터 프랭클은 1944년 10월 1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도착 직후 소지품을 모두 박탈당하고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인간 말살의 현장을 목격하며, 90%가 곧바로 가스실로 향하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인간 심리의 심오한 변화를 관찰해 내었다.  수감자들이 초기에는 헛된 희망에 매달리는 '집행 유예 망상'을 보이다가, 점차 생존을 위해 감정이 메마르는 '무감각' 상태로 접어드는 과정을 의학적 시선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마지막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이들을 보며, 인간에게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자유'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처절한 깨달음은 훗날 쾌락이나 권력이 아닌 삶의 '의미'를 근본 동력으로 삼는 로고테라피의 정수가 되었으며, "살아야 할 '왜'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떻게'도 견딜 수 있다"는 강력한 생존 철학을 정립했다.


 로고테라피는 '의미(Logos)'를 통한 치료라는 뜻으로,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 요소라고 보는 이론이다. 여기서 그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가지 가치를 제시한다. 첫번째는 창조적 가치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특정 일을 완수함으로써 얻는 의미다. 두번째는 경험적 가치, 자연의 아름다움, 예술, 혹은 타인과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얻는 의미다. 세번째는 태도적 가치로 피할 수 없는 시련에 직면했을 떄 그 고통에 취하는 태도를 통해 발견하는 의미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삼요소인 '고통, 죄, 죽음' 을 해당 가치들을 통해 낙관적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비극적 낙관주의를 주장한다. 이를 통해 빅터 프랭클은 우리의 삶의 의미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매 순간 주어지는 '구체적인 과제' 라고 정의한다. 비록 삶이 비극으로 가득 찬 것일지라도, 그 속에서 스스로 삶의 가치를 결정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인간들이 태어나고, 또 죽어가지만 그들 모두가 원해서 주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리라. 눈을 떠보니 태어나 있었고, 얼떨결에 세상에 흐름에 휘말려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지만, 그것에 명쾌한 해답을 내려 줄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결국,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통, 죄, 죽음을 겪으며,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악의로 가득찬 세계가 아니라면, 그 모든 세계가 각각의 개인에게는 삶의 의미에 대한 정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며 본인만의 가치를 따라 살아간 자를 과연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이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자유' 만이, 인간이 세상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일 것이다.


 고통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피하고 싶은 것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내와 용기를 통해 성취로 전환할 수 있는 시련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죄는 누군가에게는 숨기기에 급급한 것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것을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 삶을 책임감을 갖고 후회없이 살아가야할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의 삶의 의미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본인이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세계로 변화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결국 모두가 같은 일을 겪어도, 그것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내는 자 만이 진정한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자. 이제 우리도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보자. 1944년 빅터 프랭클이 수감되었던 죽음의 수용소에는 비할바가 아니나,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고행(?) 을 하고 있으니, 시련이 되어줄 고통은 충분히 많을 것이다. 그것을 그저 한순간의 피해야만 하는 고통으로 치부할지, 아니면 자신의 성취로 전환하여,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줄 시련으로 여길지는 온전히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그야말로,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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