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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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지음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된 계기는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그저 빠르게 전개되는 모험과 기차, 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들이 주는 속도감이 인상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왜 이 사람은 이렇게까지 시간을 지키려 할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단순한 내기 이상의 어떤 태도, 삶을 대하는 방식이 이 이야기 안에 담겨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건의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놓치는지에 더 집중하며 읽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의 필리어스 포그는 내게 정확함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감정의 흔들림 없이 계획대로 움직이고, 모든 것을 계산으로 해결하는 인물. 그런데 책을 다시 읽으며 느낀 포그는 조금 달랐다. 그는 단순히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견디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인지 그의 선택들은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보이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책임감 있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자주 들었던 생각은 “그래서 이 사람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구나”였다. 80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세계를 돈다는 것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택을 반복하는 일이다. 계획을 고수할 것인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방향을 바꿀 것인지. 포그는 기본적으로 계획을 믿는 사람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계획을 기꺼이 무너뜨린다. 아우다를 구하는 장면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앞에서 비용을 감수하고 길을 바꾸는 선택들이 그렇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정확함이라는 것이 반드시 경직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자신의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 책이 여행을 낭만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도 위에서는 직선처럼 이어지는 경로가 실제로는 수많은 변수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차는 멈추고, 배는 늦어지고, 계획은 계속 어긋난다. 그런데도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긋남 속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파스파르투의 즉흥적인 행동들은 때로는 문제를 만들지만, 결국에는 사람과 상황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포그가 만들어낸 정확한 경로 위에, 파스파르투는 계속해서 우연의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겹쳐질 때, 이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경험이 된다.
형사 픽스의 존재도 흥미로웠다. 그는 끝까지 의심을 놓지 않는 인물인데, 그 의심이 이야기 전체를 긴장 상태로 유지시킨다. 읽으면서 문득, 나 역시 어떤 일을 할 때 픽스처럼 확신보다 의심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려다 결국 타이밍을 놓치는 순간들. 그에 비해 포그는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단 결정을 내리고 움직인다. 그 차이가 결국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아우다의 존재는 이 이야기의 결을 바꾸는 지점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구출되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한 동행을 넘어 포그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된다. 특히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이 여행의 목적이 단순한 내기의 성공이 아니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진다. 포그는 처음에는 시간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지만, 마지막에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그 변화는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는다.
결말에서 드러나는 하루의 차이는 그래서 더 인상 깊었다. 그렇게 집착하던 시간이 사실은 계산의 문제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계산을 넘어서 있었던 것이 결국 사람과 관계였다는 점.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포그는 내기에서 이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었는지였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빠르게 읽히는 이야기이지만,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속도를 늦추게 만드는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왜 그렇게 가고 있는가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것 자체보다, 그 계획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 생겼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일상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빽빽하게 채워진 일정들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지. 혹시 단순히 늦지 않기 위해, 실패하지 않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포그처럼 모든 것을 계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언제 계획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책은 세계를 도는 이야기라기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기준을 조금씩 바꿔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창하지 않고 아주 조용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나는 내 시간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은 많고, 일정은 그대로지만, 그 사이에 작은 여유를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냐고 물었을 때, 나도 포그처럼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의식하며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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