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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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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5,771회 작성일 20-01-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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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 차혜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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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의 정치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가 처해 있는 특수한 개인적 환경, 특히 그가 즉위하기까지의 궁중 내분에서부터 글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옹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독재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 저자



옹정제는 청나라 제 5대 황제이자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라고 잘 알려져 있다. 전 군주인 강희제의 치세가 워낙 길었던 탓인지, 즉위했던 1722년에 이미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이후 옹정제의 시대는 13년 동안 이어졌다.  일본의 동양 사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 13년의 치세 기간을 '옹정제 본인과 그를 보좌하는 관료들이 버틸 수 있는 한계'라고 표현했다. 책을 읽어보면 옹정제는 정말 지독한 일 중독이자 관료를 엄청나게 휘어잡으면서 그들의 역량을 한계까지 쥐어짠 황제였기 때문에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독재정치’란 일정한 집단에 권력을 집중하거나 일부를 배척하면서 지배하는 비민주적인 정치를 뜻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근세 중국의 대표적인 독재 군주로 청조의 ‘옹정제’와 그의 독재정치에 관한 전반을 소개하고 있다. 옹정제가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중국의 독재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당부도 함께 덧붙인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옹정제 즉위 전 중국에 만연하고 있던 ‘보스 정치’ 이다. 당시 중국은 관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금전을 이용해 여러 곳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당과 비슷한 개념인 ‘붕당(朋黨)’이 만들어진다. 대부분 금전적인 관계에 얽혀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조선 중기 이후에 생겨난 붕당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조선의 붕당들은 정치적 이해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유대까지 공유하였다.


옹정제의 아버지인 강희제(康熙帝)의 시대 역시 이러한 붕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 붕당들의 꼭대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역시 황태자이다. 장래 천자의 지위가 보장된 황태자를 사전에 가까이 해두는 것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일이다. 그러나 독재 군주에게 있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독재정치 체제에서 황태자는 황제 입장에서는 일개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시 강화제는 두 번째 아거(‘아들’로 이해하면 된다)를 황태자로 지명하였으나, 황태자가 엄청난 정치 보스로 성장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결국 황제는 황태자를 폐위하고 만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음모와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아거는 다시 황태자에 올랐다가 또 다시 폐위당하는 비운의 태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강희제는 임종을 맞이하게 되고, ‘롱고도’라는 사람이 후계자 지명을 전달받는다. 후계자는 뜻밖에도 네 번째 아거였고, 이 사람이 바로 훗날의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는 즉위하고 나서도 한동안 그의 자리는 선제의 의지가 아닌 음모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려야 했다.


여담으로, 독재 정치에서 군주의 자식들이 많다는 것은 황권의 강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내분이 생길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듯하다. 역사적으로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갈등이 생겨 국력이 크게 기울어진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죽은 후의 연남생, 연남산 형제가 그러하였고, 넷째 아들이자 첩의 자식이었던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 맏아들 신검(神劍)과 그 동생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파탄이 난 후백제가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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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정치는 별개로 다루어야 한다. 신앙만으로 사형을 선고하면 반역의 경우에는 선고할 형벌이 없을 것이다. 

느긋하게 그가 반성하도록 촉구함이 좋을 것이다.” – 옹정제


 

저자는 옹정제의 정치 성향을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큰 주제들을 제시한다. 가장 먼저 살펴보고 싶은 것은 옹정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태도이다. 당시 청에서는 유럽 선교사들이 건너와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서양에서 자라난 그리스도교 사상은 전통적인 중국의 그것과 매우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옹정제는 한문화의 애호가였기도 했다. 중국을 훌륭하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식의 독재군주가 되어야 했으며, 그 자신도 철저하게 중국식 문화인이 되어야 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옹정제는 종교와 정치를 별개의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다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한 중국인 크리스트 교도가 의사로 전쟁에 참전하여 큰 공로를 세우고 귀환하자 요직에 추천 받는다. 그는 당당하게도, 황제에게 크리스트 교도라는 질문을 받자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질책하기는커녕, 그의 담담한 태도에 오히려 탄복하여 결국 이 사람을 관청에 출두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중국에서 그리스도 교를 믿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특히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옹정제는 이러한 점을 높이 사서 종교 문제는 덮어주고 인재를 취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에 신앙을 포기한다는 말을 겉치레라도 하는 것을 한편으로는 극도로 꺼려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옹정제가 통치하던 시절에 순교 사건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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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하루 종일 문서를 보고 대신들을 지휘하느라 몹시 분주하지만, 너희들의 상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는다.” – 옹정제


글을 읽으면서 굉장히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주접’이다. 주접은 개인이 비공식적으로 천자 개인에게 보내는 친필 편지를 뜻한다. 옹정제는 이를 확대해서 보다 광범위한 관리들에게 주접을 올리게 해서 지방의 정보를 입수하는 것에 힘썼다. 그러면서도 황제로서 해야 할 다른 일들도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바쁜 와중에도 주접들을 절대로 대충 읽는 법이 없었다. 옹정제는 아부하는 문장이나 알맹이가 없는 말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몸소 실행하는 과정이 없이 탁상에서 붓끝을 놀려 작성한 작문이 발견되면 해당 주접을 작성한 관리를 호되게 질책하였으며, 반대로 훌륭한 수완을 보여주고 만족스러운 보고를 올리는 관리에게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중간에 요령을 터득한 지방관들이 옹정제의 마음에 들 만한 주접을 꾸며서 작성하는 것을 잡아내지 못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이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울러 옹정제는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밀정 파견이라는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청조는 만주에서부터 중국으로 들어온 ‘기’ 집단의 중심 세력이 ‘팔기’라는 조직 형태로 천자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밀정 정치를 행하는 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기’란 ‘연대’ 정도의 의미로, 만주인만으로 구성된 만주 팔기와, 몽골인 팔기 그리고 한군 팔기가 합쳐서 총 24기가 존재했다.


밀정 정치의의 가장 큰 단점은 군주가 오히려 밀정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정보 통로를 한 군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밀정의 계통을 중횡 십자형으로 겹쳐 놓아야 한다. 사실, 밀정을 잘 이용하는 것은 머리가 아주 치밀한 군주가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었다.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옹정제는 밀정 정치를 이용하는 데에 수완이 매우 탁월했던 것 같다. 이러한 옹정제를 단순히 작문으로만 속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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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독재 정치 하에서 많은 것을 이루어 낸 옹정제의 모습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옹정제가 이런 뛰어난 정치 수완을 가지고도 독재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점도 같이 늘어놓으면서 독재 정치의 한계점을 똑똑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이는 서론에서 언급했던 '13년은 옹정제와 같은 황제의 시대가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다'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려 한다. 옹정제는 여느 독재 정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듯이, 자신의 황권을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기미가 보이는 신하는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숙청하거나 탄압했다. 서북 지역에서의 전쟁에 승리했던 군부의 신하 '연갱요'의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여 연갱요가 황제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정말 사소한 표현 실수 하나를 꼬투리잡는 것을 시작으로 연갱요를 공격하고 다른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이간질을 일삼았다. 끝내 연갱요는 버티지 못하고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편 문자의 옥, 서책이나 시구 등에 나온 문구를 이유로 들어 탄압하는 공포 정치의 일환으로도 옹정제는 악명이 높다. 강서성에서 당시 관료를 뽑는 과거제를 책임지던 '사사정'은 과거 시험에서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제를 냈는데, 여기서 '유(維)'와 '지(止)'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차감했다고 해서 이를 옹정제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뜻으로 억지로 해석하면서 사사정의 구족을 멸해버린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독자들이 온통 중국에서 일어날 일들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자신의 의도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며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는 그 지도자의 노력에 비해 아주 적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옹정제의 정치를 통해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 책의 저자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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