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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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1453년 4월, 콘스탄티노플은 스무번째 시련을 맞이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이오스 시절의 사산조 페르시아, 레오 3세 시절의 우마이야 왕조, 레오 5세 시절의 불가리아, 키예프 공국 등, 800년 동안 외세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은 로마의 자존심이었다. 십자군의 배신으로 한번 도시를 내주기는 했지만 금세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시련. 4세기에 건립된 이후로 한번도 무너지지 않은 테오도시우스 삼중 성벽 앞에는 들판을 뒤덮은 10만이 넘는 오스만군이 자리잡고 있었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바다에는 오스만 함대로 뒤덮여 있었다. 7천명 밖에 되지 않은 방어군을 지휘하는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오스만군과 그 지휘자인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로마 제국”
지금까지 수많은 이민족과 외세들이 로마 제국을 탐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이유, 로마 노바 콘스탄티노폴리타나의 (Roma Nova Constantinopolitana) 존재다.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는자는 정당한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할 수 있었고, 둘로 쪼개진 그리스도교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다. 광대하던 제국은 도시 하나로 쪼그라들었지만, 오직 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 한명이었다. ‘도시중의 여왕’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별명이 아니다. 다른 곳은 다 내줄 수 있어도 콘스탄티노플 만큼은 내줄 수 없다는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방어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금각만에서는 동로마의 함선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고, 테오도시우스 성벽 위에서는 방어군이 10배가 넘는 오스만 군을 상대로 한달 넘게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군의 거포 앞에서 성벽은 점차 무너져갔고, 지속적인 전투로 방어군은 지쳐만 갔다. 5월 29일, 지속적인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콘스탄티노플에 메흐메트 2세는 최정예부대 예니체리를 포함한 모든 병사들을 동원해 최후의 공세를 펼쳤다. 마지막 싸움이 될 것임을 직감한 방어군도 조상들이 물려준 로마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처절한 싸움 끝에 방어군 지휘관 주스티니아니가 중상을 입고 후퇴하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방어군의 사기가 꺾이고 말았다. 결국 난공불락이라던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은 무너지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용병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탈출하기 위하여 항구로 퇴각했다. 성벽위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피신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광장으로 모여 끝까지 항전했지만 성당으로 몰려드는 오스만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자신의 근위대와 난전 중에 최후를 맞이하면서 2200년을 이어온 제국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로마의 유산을 물려받아 후계자를 자처하기로 마음먹은 메흐메트 2세는 근위대를 파견에 상징적인 성당 몇군데를 지키기 시작했지만, 병사들이 벌이는 약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제국이라는 주인을 잃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기게 되었다. 도시를 탈출해서 이탈리아로 간 로마 제국의 유산은 르네상스라는 형태로 다시금 꽃을 피우게 된다. 이렇게 각자의 공방전이 마무리되고, 보편제국 로마는 종말을 맞이하면서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던 동로마 제국이 최후를 맞이하면서,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유럽이 이슬람 세력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400년 뒤에 19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였다.
그리고 2019년 현재, 홍콩에는 행정장관 직선제와 홍콩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격렬한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행정부와 공산당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진압하라는 명령. 홍콩이공대에서는 고립된 대학생 100여명에 경찰의 진압에 맞서서 아직도 투쟁을 벌이고 있다. 홍콩 출신 경찰인지도 불분명한 자들이 무장하고 시민들을 잡아가고 있으며, 홍콩의 외곽에는 인민해방군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언제든지 홍콩으로 군대를 투입하겠다는 중국 공산당. 실종된 사람들이 변사체로 발견되고, 이를 사고사로 처리하는 홍콩 행정당국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반환 받을 때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약속한 중국은 이제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이 일국양제를 부정하고 있다. 홍콩 반환의 당사자인 영국은 홍콩의 자유와 존속이 위협 받으면 관여 할 수 있는 의무가 있음에도, 브렉시트에 허우적거리면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하고는 강대국 그 누구 하나도 홍콩 시민들의 자유를 지지하는 성명서 하나 발표하지 않는다. 중국의 거대한 시장과 공산당의 정보 통제가 자유 국가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는 것이다.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야당이지만, 여전히 중국 공산당 앞에서는 바람 앞에 등불이고 홍콩의 자유를 향한 실질적은 제도 개선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불행 중 다행이도 미국의 상하원이 만장일치로 홍콩인권법과 무기금수법안을 통과시키고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미중 무역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에 요란하게 떠들기만 할 뿐이지 실질적인 반격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시아 금융 허브인 홍콩을 통해서 투자를 받고 자금을 조달하던 중국 입장에서는 홍콩이 받던 특별한 지위를 상실하면 경제적 애로사항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홍콩을 놔두자니 공산당 통치 체계가 흔들리면서 체제를 보장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니 군대를 투입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홍콩 경찰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반대파들을 서서히 말려죽이면서 탄압하는 형태로 홍콩을 장악하려고 한지 오래전부터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정보통제로 이미 시민들에 대한 실시간 감시와 탄압이 일상화된 중국은 거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이미 전 세계 각국에 갑질을 시전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계속 딴지를 걸 수 있는 국가는 오직 미국과 유럽뿐이다. 미국의 입김으로 지금 당장은 소강상태여도 홍콩의 자유는 아마도 서서히 사라져 갈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중국은 홍콩을 본보기로 그 마수를 주변국에 뻗치려고 할 것이다. 다음은 대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은 대한민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마수가 뻗어오고 있지만, 집권여당에서는 선거법 개정에만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지 진지하게 대비하는 의원 한사람이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홍콩의 자유에는 입을 닫고 침묵하고 있다. 물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중국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여당의 공식적인 반응은 표명하지 않는 것이 현실적이긴 하다. 하지만, 80년대 민주항쟁과 촛불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표명한 대의명분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어디가서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말하기 부끄럽게 되어버린 꼴이다.
물론 5년 전부터 중국의 부상과 영향력 확대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력을 코앞에서 맞이하는 것은 대만과 대한민국이다. 당장은 거대해진 중국과 거래를 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챙기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거대한 시장과 공산당의 통제 앞에서 자유를 논하지 못한다면 그저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들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전부터 계속 말해왔지만, 전세계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은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고, 그 사이에 끼인 우리는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줄타기를 통해서 양쪽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전략은 일본과 유럽, 인도정도의 국력과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여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느니, 단호하게 한쪽 편을 확실히 드는 것이 낫다. 중국과 대한민국은 정치-사회 체계상 공존 할 수 없는 체질이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야 될 편은 미국이 되어야 한다.
금세기 안에 중국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049년 홍콩은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고, 대만과 대한민국은 보다 직접적인 중국의 간섭에 노출될 것이다. 그리고 홍콩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덮쳐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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