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나다 며칠은 먹었다
페이지 정보

본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시집
며칠 전 라디오에서 박준 시인을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다. 젊은 시인인데, 눈물이 많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너무나 평범한 언어로 평범한 삶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특별하지 않은 시이기에 더 특별한 시, 예뻐지려고 하지 않기에 예쁘게 더 와 닿는 시, 내 마음을 토로했는데 결국엔 너의 마음도 같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다. 박준 시인의 시를 읽으며 가슴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나의 비밀을 들킨 듯, 나의 속내가 공개된 듯 얼굴이 달아오르며 코끝이 찡 해왔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면서 속마음을 읽으려고 할 때,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속내를 보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속내는 결국 나의 속내, 우리 모두의 속내라는 것을 깨닫는다.
꾀 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하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위의 시 <꾀 병>은 읽을 때마다 시인이며 소설가였던 이상이 생각나고, 이상의 단편소설작품인 <날개>가 생각난다. 이상의 소설 속의 아내처럼 시 속의 '미인'은 내 이마를 짚었다가 웃으면서 나간다. ‘꾀병’을 앓고 있는 나를 두고 어디를 가는 걸까. 시인은 시집 속의 다양한 시 속에서 미인을 등장시키면서 미인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미인을 통해서 시의 완성을 도모한다. 그렇다면 미인은 시인의 단짝이기도 하고, 시인의 멘토이기도 하고, 시인의 또 다른 자아, 혹은 분열된 자아이기도 하다. ‘유서’를 쓰고 싶을 만큼 아프기도 했지만, 사실은 ‘꾀병’이라는 것은 몸의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을 일컬음이다. 마음에서 피어나는 ‘열꽃’ 때문에 자꾸만 아픈 시인은 잠든 미인의 얼굴에 든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고백한다. 빛을 향해 나가고 싶지만, 허락되지 않는 삶, 그렇기에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낸다’고 생각하는 시인.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낸 시인이 다음 생에는 미인으로 태어나길 바라고 있을까. 아니면 햇빛으로 태어나길 바라고 있을까.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로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시인은 예나 지금이나 참 배고픈 직업이다. 함민복 시인은 시 한 편의 값이 너무 헐하지만, 과연 누군가에게 그 값을 하고 있나 반성하는 시를 쓰며 오히려 감사했고, 백석의 애인 김영한 여사는 천억이 백석의 시 한 줄 값도 못된다며 다시 태어나면 시인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위의 시는 얼굴도 모르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시인의 모습이 나온다. 시인도 먹고 살아야하니 쓰고 싶은 시는 쓰지 못하고, 남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한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으며’, 당신의 이름에 의지하며 마음이 허허로울 수밖에 없는 며칠을 버텨낸다. 시인은 생계유지를 위한 일이 참 서글프지만 글 쓰는 일을 게을리 하거나 기죽지 않고 ‘모든 글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감성을 범인은 따라갈 수 없는가보다.
마음 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시인 곁에는 늘 미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인’은 시인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끈이며 통로로 보인다. 동백을 보고 바다를 보던 미인은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갈까’라고 묻지만, 시인은 그게 ‘한철 머무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기에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라는 싱거운 말로 답변을 회피한다. 더 나아가기 위해 내 손을 꼭 잡는 미인과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은 나와의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있지만 분명 지향하는 것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비록 ‘한철 머무는 마음’이지만 그 순수한 사랑의 시절에는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면서 아까운 줄 모르고 행복해 한다. 그 마음이 영원하면 좋지만, 살아보니 결국 ‘한철’이라는 게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한철이 아니라 영원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그 시절의 순수가 그리워지는 시다.
눈물이 많기로 유명한 시인이라고 하는 박준 시인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려올 때 참 서글서글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살짝 어눌한 말투가 정겹게 와 닿았다. 시인 박준의 첫 시집, 그럼에도 오랫동안 써왔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언어조탁의 매력이 보인다. 그렇게 눈물과 순수가 느껴지기에 다음 시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나이라서 더 많은 가능성이 있기에 참 기대되는 시인이다. 박준의 시들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많은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길 바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아직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지탱해준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도록 그 순수함을 부디 잃지 않길 바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