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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선 어째서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C. M. 마르티니, 약함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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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5,236회 작성일 19-11-07 00:19

본문

하느님께서는 어째서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C. M. 마르티니 지음, 안소근 옮김, "약함의 힘"




- 1 -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콜로새서 3:14

 

하느님께서 어째서 시련을 내리시는지를 말하고자 하면서 그 서두로 ‘사랑’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논조로 들린다. 혹자는 격한 어조로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가혹한 시련은, 하느님의 사랑이 정말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하고.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이러한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을 내놓으려고 한다. “시련이야말로, 사랑을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이 아닙니까!”


 

- 2 -

 

“사랑이 나를 한다”

연세대학교 비교문학 강사 한보희 교수님의 ‘사랑의 담론’ 수업 中

 

언젠가 연세대학교 한보희 교수님께서 ‘사랑의 담론’이라는 철학 수업에서 말씀하신 ‘비문법적’ 표현을 귀동냥하는 것으로 본론을 시작하려 한다. 이러한 비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한편, 우리가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사랑한다’라는 표현은, 사실 사랑의 본질을 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이는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타자(他者)화’하는 것이고, 이는 ‘(나는) 운동을 한다’ 등의 능동적인 사태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든, 혹은 가족 간의 사랑이든,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이웃 간의 사랑이든, 사랑의 이러한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도려내고 비어있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을 수반한다. 시련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결국 자신에게 비어있는 공간을 선물하는 여정이다. 이러한 사랑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답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여기에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저서의 한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본론을 한 단계 더 진전하고자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웃을 도와야 한다.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가 이웃을 돕게 되기를!”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 3 -

 

이쯤에서 다비드 마리아 투롤도 신부의 글과 다미앵 신부의 일화를 잠시 묵상해 보자. 다비드 신부는 그의 저서 (D. M. Turoldo, “Cosa pensare e come pregare di fronte al male”, in Servitum, 1989, n. 64)에서 질병과 죽음에서 치유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반문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견딜 힘과 죽음까지도 기꺼이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청한다. 하느님께서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변화를 일으키도록 기도한다.

 

다미앵 신부는 4남매가 모두 수사와 수녀가 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벨기에의 한 성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또한 해외 선교를 매우 중시하던 ‘예수와 마리아 성심수도회’에 들어갔고, 하와이 호놀룰루 대성전에서 사제의 품을 받았다. 그가 선교 활동을 시작할 즈음, 하와이는 나병 환자를 격리 수용한다는 명목하에 몰로카이 섬에 사실상 그들을 추방하였다. 다미앵은 이들의 고통을 보듬고 함께 아파하기 위해서 몸소 몰로카이 섬에 입도해서 그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나병 환자들은 그를 적대하기 일쑤였고, 결국 다미앵 신부는 그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한다. “하느님, 저에게도 나병을 허락하소서. 저에게도 나병을 주시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저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소서.”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다시금 묵상해보려 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끝내지 않고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는, 실로 자신을 지극히 타자화하는 과정을 겪으셨다. 이러한 그의 사랑으로 그분께서는 구속 사업을 완성하셨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분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걷지는 못해도, 우리에게 내려지는 시련을 통해 도려내진 공간에 그리스도께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분께서 친히 머무르시어 정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자신마저 내려놓은 자리에 그리스도를 모신 채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한데 모여서 그 종점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범인류적(汎人類的) 사랑이 우뚝 자리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사랑이 나를 (...) 한다"라는 비문의 괄호 안을 채워넣어 "사랑이 나를 (그분 안에 자리하게) 한다"라는 완성된 문장을 볼 수 있도록. 

 

- 4 -

 

글은 매우 장황하게 써 내려왔다. 마지막 마무리를 생각하면서 문득 느끼는 것은, 부끄럽다, 였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에서 나오는 표현을 살짝만 빌리자면, 고통은 이토록 가득한 와중에 글은 너무나 쉽게 쓰이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시련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인간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꿋꿋히 억누르던 어제를, 다시 절망 가득한 오늘로 덮어버리던, 그리고 그것이 다시 절망 가득한 내일로 이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매 순간을 그저, 이 지옥도(地獄道)와도 같은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관성으로만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심적으로 극도로 괴로워하던 와중의 나는 돌이켜보면 그저 원망하기에 바빴던 것 같아 부끄럽다.

 

하느님, 위에서 논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기에는 제가 아직 부족하오나, 이제는 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직면할 용기를 주소서. 이제라도 저에게 작은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하심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하소서.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 이제 너희는 나를 더 알게 되었다. 너희는 나와 함께 고통을 겪었으니 나와 함께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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