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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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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충선
댓글 0건 조회 5,421회 작성일 19-10-02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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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김형석 지음




가끔 예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었나 하는 생각들이 들 때가 있다. 예전의 내 모습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예전에 내가 쓴 일기나 글들을 찾아서 보는 방법인데,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에는 생각을 정리하는 글들을 떠오를 때마다 종종 쓰는 편이지만 그것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정리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도 많고 행여나 남아있다고는 해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던 중 찾아온 행운이랄까, 우연히 내 계정의 네이버 블로그 페이지에 이십대 초중반에 몇 가지 내가 써놓은 글들을 찾을 수 있었고, 글들을 읽으면서 그때의 나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꽤나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글의 대부분이 신앙서적을 읽고 쓴 독후감이거나, 그날 하루에 있었던 일들과 기분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감사하는 글들이었다. 글로 쓰여진 것이라 많이 미화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느껴봤을지 기억조차 까마득한 순수한 행복이 글에 담겨져 있는 것이 느껴져 조금은 마음이 아려오기도 했다. 꽤나 오랜만에 신앙서적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김형석 교수가 쓴 '예수' 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기독교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예수를 조금이나마 더, 혹은 다시 알고싶었다.


예수가 걸어간 길이 어떤 길인지와 관련하여서, 책의 초반부에서 예수가 사역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악마가 나타나 제시한 문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홀로 40일간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를 드렸을 때, 예수의 앞에 악마가 나타났고, 세 가지 문제를 제시했다. 악마가 제시한 세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당장 눈 앞의 돌들로 하여금 떡이 되게 하여 우선 굶주림을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2.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주며 "이것들은 세상 권세에 속한 것이며, 나에게 위임되어 있다.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따른다면 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3. 악마는 성전 꼭대기에 예수를 한 후 말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려라. 성경에 있는 말대로 하느님이 자기 사자들에 명하여 그대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손으로 그대를 받들어 그대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렇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떡의 문제, 즉 돈과 경제의 문제는 아무리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의 인생의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복음에 있지 경제 문제가 있지 않았다. 믿는 자들에게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삶 자체를 해결짓는 복음을 주는 것이 예수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보여주는 네 개의 복음서에는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을 포함하여 예수가 군중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사건들이 종종 나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군중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기적들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한 도구로써 행해진 기적들이었다. 오히려 많은 돈은 인간으로 하여금 돈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 는 성경 구절은 부가 필요이상으로 충족되고 그것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때 인간이 부의 노예가 되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최우선순위가 쉽게 돈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뒷전이 되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렇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만 있으며, 홀로 그 분을 섬길 따름이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는 명성이나 재산이 전혀 없는 소시민이었으며, 그 상태에서 하늘나라를 위해 전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자신의 말에 귀를 귀울이게 하는 것은 태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무모한 짓이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있었던 유대인들이 원하는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는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줄 강력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예수가 만약 악마에게 경의를 표하고, 권력과 지위를 달라고 했다면 혹시 유대인들의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어 로마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대인들의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가 염원하는 나라는 그런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책의 씌여진 표현을 빌리면 그 나라는 "로마의 권력이 아니라 나사렛과 같은 변방 마을의 빈민들 속에 세워지며, 로마의 귀족들이 아니라 병에 시다리는 사람들, 권력의 그늘에서 희롱당하는 가엾은 여성들, 죄의식 때문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는 억눌린 사람들 속에 그들을 위해 건설되는 나라이어야 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렇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세 번째 질문은 더욱 더 달콤한 유혹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해도, 권력이 있어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선망받는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예수가 성전 꼭대기에 서서 성전 밑에 있는 많은 군중들을 내려다보며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그 발을 붙들어 상하지 않는 것을 군중들이 보게 된다면, 수많은 군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고 인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예수가 성전 꼭대에서 서서 많은 군중들을 내려다보면서, '여러분, 보시오. 내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이제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더라도 야훼께서 천사들로 하여금 내 발을 붙들어 상하지 안는 것으로 표적을 삼을 것입니다' 라고 외친다 하자.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 곁으로 구름같이 몰려들 것이다. 전도를 하기도 쉬우며, 복음을 전하는 데도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군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기적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보내심은 단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스스로의 뜻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이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적인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 져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함께 머물며 동반자가 되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사역기간 가운데 인기를 쫓아 다니지 않았다. 사랑의 마음으로 병든 자를 고쳤지만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 자리를 피했고,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일은 귀하지만 그것은 자신들과 이 세상의 책임자가 지도자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고, 이 책임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속적인 힘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단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과 같이 울고 기뻐하고 그들의 곁의 머물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돕는 일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해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서 사랑 이외의 다른 세상적인 방법을 쓰는 것은, 오히려 본질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질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악마는 예수를 설득할 때 '성경에 있는 말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당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도층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극단적인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지식을 자랑하며, 구약성서에 나온 율법들을 빗대어 율법에 어긋한 사람들을 정죄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그들을 꾸짖는 율법사들이 예수를 시험하며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물었을 때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5-40)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성경에 소개되어 있다.

어느 날 율법 학자와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한 한 여자를 끌고 왔다. 그들은 여자를 잘 보이는 곳에 세워 놓고서는 예수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는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이 질문의 의도는 예수를 싫어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향한 덫을 놓기 위함이었다. 살려주라고 하면 유대인의 율법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위선자가 되며, 사형 집행 권한을 가지지 못한 로마인이 아닌 자가 사형을 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 곤란한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이와 같이 답변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사람들은 하나 둘씩 여인의 곁을 떠나고 예수가 다시 말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이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가 율법을 잘 모르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성경에 예수는 자신이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벌을 주기 위해서만 잇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은 언제나 연약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 일화에서 예수가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은 것은 여인에게 죄가 없다거나 간음하는 행위가 정당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고통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예수가 여인에게 자신에 의한 것이든, 타인에 의한 것이든 죄로부터 다시는 억압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길을 걸었던 예수의 일생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숭고하면서도 특징적인 것은 바로 끝없는 범 인류적인 사람과 그를 위한 자기 희생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 자체가 스스로를 온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함이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번제의식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죄 없는 자신만이 속죄제물이 되어야 영원한 속죄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고 얼마 후에 자신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을 향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는 '사랑 안에서는 원수가 없고, 완전한 사랑을 위해 인류를 위한 고통의 짐을 지지 않을 수 없다'는 예수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어렸을때부터 교회에서 교육을 잘 받아온 사람들이 항상 하는 고백이 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의 깊은 심정을 나는 하나하나 다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고백은 입버릇처럼 쉽사리 할 수 있는 고백도 아니며, 그 고백의 무게를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석한 것은, 이렇게 고백하는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돈을 쫓으며, 권력을 얻고 싶어하고, 인기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크리스천 공동체 내에서 명성과 인기를 얻기 위해 거룩한 척을 하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이 보이는 것이 기독교의 슬픈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나 역시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20대 초반 즈음 교회 청년들이 교회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노방전도를 나가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소위 '빨간집' 이나 성인 나이트클럽 같은 건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하루는 세네 명이 짝을 지어 전도를 나가는데, 인솔하시는 타 교회에서 오신 전도사님이 치킨 집 근처에 그냥 봐도 불량한 학생들이 담배를 피며 모여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스스럼없이 복음을 전하시는 전도사님을 보여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옆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 중 한명이 교회에 나가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전도사님이 나의 번호를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었고, 그 때 나는 얼떨결에 알려주긴 했지만 무서움에 '엮이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 때의 나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도대체 나는 저들보다 무엇이 우월하길래, 나와 저들이 다른 것이 무엇이길래 이런 거부감이 들었을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생각했었던 내 위선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았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하나님과 조금 많이 멀어져서 그런지 오히려 그때보다 더 추악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끔찍한 죄를 짓기도 하고, 매 순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더 내 악한 모습들에 대해 억압받고 힘들어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있을 때 평안함을 주신다고 했는데 평안함이라고는 온데간데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러던 중 네이버 블로그에 7년 전 썻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많은 트러블들이 있겠지, 사는 것이 힘들수도, 공부가 힘들수도, 순간순간이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사는 것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 정말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허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직접 그런 생각을 해 본 사람에게 허세니 뭐니 정신 차리라느니 뭐니 하는 등의 말들은 아무 소용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날 싫어하는 사람이든, 나와 가까운 사람이든.. 혹은 어쩔 수 없이 나와 멀어져야 하는 사람이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짐 진 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고 싶은데 맘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나의 문제는 아마 이때부터 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적인 존재가 내 힘으로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 이상적인 상황을 내 힘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매번 유혹에 무너지고, 같은 죄를 범하며 절죄된 삶을 살지 못하면서 악을 행하고, 나이가 먹으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점점 더 커지며 내면에서의 불안감이 항상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 사랑과 범 인류적인 이웃 사랑'은 절대 내 힘으로 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것'은 스스로의 힘을 써서 억지로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힘을 계속해서 내려 놓는 것일 것이다. 예수가 걸어온 길과 같이 끊임없는 노력들과 매고 있는 짐들, 돈과 권력과 인기를 향한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것.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 질 때 기독교는 개독교가 아닌 다시 기독교가 되고 나는 다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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