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지 – 리처드 탈러
페이지 정보

본문
넛지 – 리처드 탈러
이규섭
그다지 남들처럼 스펙타클한 어린 시절을 보내진 않았지만, 돌아보면 여태까지의 인생이 나름 옹골차게 개성 있는 사건들로 모여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15년 전 떠났던 수련회에서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할 게임을 하나 하게 된다. 이름하여 ‘우리의 이익을 최대로’.
너무 오래전이라 왜곡되고 조금은 앞뒤가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규칙은 이러했다. (구체적인 수치는 모두 임의로 지어낸 값이다.)
1. 각 그룹의 학생들은 한 팀이 된다. 편의상 5개 그룹이었다고 치자.
2. 매 스테이지마다 학생들은 찬성 혹은 반대를 할 수 있다.
3. 모든 그룹이 찬성을 하면 각 그룹은 50 씩의 포인트를 가져갈 수 있다.
4. 하나 이상의 그룹이 반대를 하면 그 그룹만 60포인트를 가져간다.
5. 모든 그룹이 반대를 하면 아무도 포인트를 가져갈 수 없다.
그리고 조장들이 나가 회의를 한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다 함께 찬성을 누르기로 합의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룹으로 돌아와서 조원들에게 그 사실을 전한다. 그러면 조원들 중 하나는 마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다는 듯이,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여기서 우리만 반대를 하면 어떨까. 그래. 어차피 남들이 반대를 택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 기댓값의 측면에서 반대를 택하는 게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12살이다. 순수한 마음이 남아 있을 시기. 우리에게는 합의한 내용이 있으니 찬성을 누르자. 그리고 한번 지켜보자. 우리는 그렇게 찬성을 택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우연인지 단 한 팀이 반대를 눌렀다. 배신한 것이다. 그 팀은 단독으로 60점을 벌어갔다. 눈치 빠르게 기회를 포작해서 남들과 격차를 벌리는 사람들. 요즘은 이런 친구들을 ‘난 놈’이라고 부른다. 여담이지만 어르신들은 ‘난 놈’이 이런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튼 우리는 다시 모였다. 이렇게 되면 찬성을 누르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래도 한 번 더 믿어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조장들끼리 모인다. 항의도 하고 했겠지. 하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게임다운 모습이 시작된다. 점수차는 벌어졌고, 아이들은 위기감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똘똘한 아이들의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러니 조장들은 태연히 연기한다. 이번에야말로 찬성을 누르자고. 하지만 모두가 찬성을 눌러서는 이미 벌어진 점수 차이를 메울수 없고, 아이들도 그정도는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룹에 돌아와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반대를 제의한다. 이번에야말로 서로를 단단히 속였으니 반대를 눌러 우리가 당해서 잃은 걸 되찾자고. 어째서인지 몇몇 팀은 찬성으로 돌아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꾸준히 두 팀 이상이 반대를 눌렀다. 모두가 찬성을 택하는 경우는 끝내 나오지 않았고, 결국 처음에 눈치 빠르게 이득을 본 그룹은 점수차를 유지한채 최고 점수를 획득했다. ‘난 놈’은 ‘난 놈’이렷다.
그러나 우승팀의 영예는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았다. 게임이 끝나자 강사가 무대로 걸어 나와 말했다. “이 게임의 목적은 우리의 이익을 최대로 하는 것입니다.”라고. 우리는 매 스테이지 250의 포인트를 벌 기회가 있었음에도 수 스테이지 동안 120포인트 정도씩만 얻어가고 있었다.(눈치챘겠지만 반대를 택하면 240포인트를 버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했을 뿐, 우리 모두의 이익을 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부터 아이들은 남들은 모두 속이면서 동시에 반대를 눌러서 "남들보다 더 점수를 버는 방법"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되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이게 12살짜리들 한테 할 짓인가 싶다. 이전까지 잔뜩 경쟁하는 게임으로 분위기를 무르익게 해놓고는. 수능 문제만큼이나 치사한 함정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하.
하지만 분명 흥미로웠던 게임이었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어떻게든' 장기적으로는 전체 사회의 이익을 증가 시키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장 경제에 익숙해지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고 믿게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에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있더라도 완벽하지 못하다. 적어도 그렇지 않는 경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음을 나는 이 게임을 통해 깨달았다. 때로는 개인의 이익추구에서 한발 물러서서 냉정하게 사안을 바라보고 합의와 협동을 이루어 낼 때에 더 큰 이익을 얻게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하지만 보았듯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작자가 얼마나 깊은 생각으로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깨우치고 이를 교화 시키려는 목적은 아니길 바란다. 이 게임 이후로 인간 불신에 빠진 친구가 없기를. 수련회라는 목적에 맞게 사회화에 걸맞는 주제였을 지도 모른다. 협력과 협동의 중요성을 그저 강조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장치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나 나는 이 게임을 통해 잘못 설계된 시스템 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자연스레 모두의 이익을 증대 시키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질 것을 배웠다.
꽤나 종종 그렇지 않은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음에도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는 상황이 닥친다. 자칫 아무것도 얻지 못할 위험이 항상 공존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게임보다도 복잡하다. 그저 포인트를 벌지 못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 손실을 담보해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두가 동일한 조건이 아니기에 때로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는 약자가 희생하는 것이 최적인 상황이 오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 대해 절대적인 답안은 존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사회는 개개인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할 때가 있다. 집단의 필요에 의한 요구다. 이러한 요구는 대체로 강압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단순한 인센티브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당근과 채찍이 전부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원초적인 행동 양식에 반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개개인의 협조를 쉬이 얻어낼 수가 없다. 넛지는 이러한 개개인을 보다 세련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기법을 제시한다. 말 그대로 옆구리만 찌르는, 그러면 객체가 본인 의지대로 자연스레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기법이 모든 문제에 해결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주장하듯 확실히 더 많은 부분에 기여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요구가 상충하는 경우에도 좋은 시스템만 마련된다면, 인간은 그 안에서 본성에 따라 행동하면서 자연스레 사회의 요구에 상응하는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못 읽는 단어가 ‘당기시오’라는 농담이 있다. 당기시오라는 팻말은 당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사용자에게 당길 것을 요구한다. 사람은 편한 것을 좋아하며, 미는 문과 당기는 문에 디자인 차이가 없다면 사용 방식에 차이를 둘 필요성이 사라지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가장 편한 미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 당기는 문으로 쓰이길 바란다면, 당기는 문은 밀어서 열리지 않게 만들고, 미는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야 한다. 손잡이가 달리면 이것이 곧 당기는 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문을 당겨서 열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누구의 강요도 없이, 누구도 불편함을 감수하거나 희생하는 것 없이, 평소처럼 지내면서도 건물주와 이용자 모두가 문제로 부터 자유로워진다.
넛지를 통한 문제 해결 방식은 어찌보면 이제 필수적이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무언가를 강압적으로 시킨다는 것은 어느 하나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거에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젠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 할 때마다 그 후속 문제가 무엇일지 우려해야 하며 이를 가벼이 여겼다가는 한참을 부작용에 골머리 썩여야 한다. 적절한 최적점을 찾는 게 중요한 시대에 객체의 행동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전략은 찾기 어려운 만큼 그 결과도 효과적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공동의 이익을 저해하지 않을까? 그저 내버려 두어서는 안될 문제다. 자연 그대로의 혹은 기존에 어쩌다 자리잡아버린 시스템은 어쩌면 문제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우리의 이익을 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어리석고 우매해서가 아니다. 욕심이 그득하고 그들의 부모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법만 배워서도 아니다. 그저 그 게임의 분위기가 경쟁을 유도하고 모두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을 뿐이다. 결국 마지막에 ‘이런 반전이!’를 외치며 교훈을 주려고 설계되었을 뿐이다. 교육 자료로써의 결과는 아주 효율적이었지만 말이다. 만약 학생들이 공동의 이익을 생각 할 수 있도록 넌지시 밀어주는 요소가 있었다면 게임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고 훈계하거나, 누군가를 처벌하고 포상하고 마는 것은 방편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정말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런 기분 풀이식 해결책으로는 부족한 시대다. 센스있는 이정표 하나로 각자가 제 갈 길을 가면서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방법을, 그런 사회의 시스템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고 또 생각해 내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이전글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19.10.09
- 다음글버닝맨, 혁신을 실험하다. 19.10.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