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지희
댓글 0건 조회 6,453회 작성일 19-10-09 14:56

본문



<의미를 빚고 깨뜨리기>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그레이슨 페리 저)


백지희



 얼마 전 프랑스 파리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리고 파리의 필수 코스인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읽을 책을 고르다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선택했다. 나도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 이 책에 대한 내 예상이 조금 틀렸다. 책 두께도 얇고 얼핏 넘겨가며 본 삽화도 귀엽길래 처음에 선택할 때는 예술 문외한인 독자들을 위해 감상법을 알려주는 말랑말랑한 에세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유쾌하고 재미있기는 했지만 실제 예술가인 저자가 자신이 속해있는 현재의 예술계에 대해 신랄하고 치열하게 쓴 글이었다. 그래서 책은 얇지만 읽기가 조금 어려웠다. 서양 미술사 하면 알고 있는 인상파를 지나 입체파도 지나 맨 마지막, 중고등학교 미술 시험에 잘 안 나오던 부분을 다루고 있으니. 나는 모더니즘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을 읽고 있으니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쓰는 글에는 상당 부분 배경지식 부족으로 인한 오독이 들어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도 나처럼 제목에 낚여 이 책을 펴게 된 문외한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온 이후 예술과 예술의 의미는 상당히 많이 변화해 왔다. 작가는 이 글에서 현대의 예술 범위를 이렇게 비유한다.


 ‘예술이 가방이라면 어떤 종류의 가방일까 생각해 봤는데, 나는 그게 쓰레기통 안에 끼워 쓰는 녹색 싸구려 비닐봉투라는 생각이 든다. 쓰레기통에서 뽑아서 문밖에 내다 놓을 때마다 그 안에 든 쓰레기들이 카펫 위에 쏟아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그런 비닐봉투 말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종류의 가방이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투과성이 좋고 반투명하며 불명료한 가방이 되었다.’


 여기에선 어떤 것이 예술인지에 대해 정확히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의 의미를 어떻게 협상하는지를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유명한 미술관들과 바이어들이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소위 힙한 예술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루브르나 오르세에 있는 ‘명작’들이 그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는 계기와 그 의미와 의의를 상당 부분 자의적으로 만들고 지어내는 것이 미술계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 명작의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그래서 이 책의 전반부를 읽으면서는 공허해졌다.
 
 더하여 현시대의 미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술의 범위에 도전하여 뒤샹은 소변기를 미술관에 가져왔다. 뒤샹은 '샘'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의 이름을 미술사에 새겼다. 그 후 예술의 범위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예술계의 주류가 되었고, 2019년 현재에는 예술은 압정 하나도 찌를 틈 없는 빽빽한 메모판 같다. 더 이상 새로운 도전과 충격을 만들 수 없고 그렇게 충격을 주는 것 자체가 예술의 장르가 되었다. 그러면 ‘예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마치 소변기에 심오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뻥튀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작가의 배경이 입사할 때의 이력서처럼 쓰인다. 예술계는 미술 경매 바이어들과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연합하여 그 이름에 붙은 권위를 인정해 준다. 거기에 명예와 자본이 붙어 모든 것이 거품같이 불어나는 하나의 투자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의 피드나 SNS 광고 속에서 존재하는 힙하고 쿨한 이미지, 요새 말로 '감성'? 하지만 반년만 지나도 촌스러워지며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이 목적도 방향도 없이 우르르 달리는 유행 같다. 여기에서 진정한 예술을 따지는 것은 오히려 공허한 말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숨겨왔던 예술에 대한 애정을 공개한다. 그래서 전반부를 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술계는 일반 대중과 다른 숭고하고 대단한 곳일 거라는 편견을 깨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업계에 있는 사람은 그 업계의 생태며 부조리를 모두 알고 3박 4일도 떠들 수 있지만,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왔기 때문이며 이 업계에 오게 된 꿈과 이상이 그러한 부조리에도 아직은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 그러한 애정이 드러나는 부분을 즐겁게 읽었다. 작가는 그럼에도 예술이란 무엇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답을 내지 않는다. 이러한 혼란 자체가 현시대의 예술이라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작가가 하고 있는 예술 분야인 도예와 관련하여 이렇게 비유하고 싶다. 예술을 하는 것은 의미를 빚는 일이다. 그것이 그림이든 조각이든 사진이든 미디어 아트이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듯한 유화 작품이며 살결이 보들보들한 조각 작품이 본질이 아니라. 이전에 없던 의미를 빚어내는 것.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또는 마음에 안 드는 도자기를 깨버리듯 기존의 질서와 의미를 깨버리기도 한다. 그러한 깨짐 자체가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최근에 나왔던 이 기사를 떠올렸다.

 ‘이 조각상 제발 일으키지 마세요’ (조선일보. 2019. 7. 1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7/2019071700106.html
 작가는 폐허가 된 미술관을 표현하기 위해 조각상을 쓰러뜨린 채로 전시하였다. 그것을 넘어졌는 줄 알고 관람객들이 일으켜 세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웃기고 귀여운 에피소드이기도 하지만 기사 말미에 작가가 이야기 한 것처럼 폐허가 된 미술관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관객들이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관객 참여 퍼포먼스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보면 우연히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이 에피소드가 더욱 재밌고 귀하게 느껴진다.


 가을에는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봐야겠다.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는 항상 도슨트나 오디오가이드를 들으며 감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보다는 오롯이 나만의 생각과 감성대로 찬찬히 즐겨보고 싶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