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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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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윤
댓글 0건 조회 5,949회 작성일 19-07-0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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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연설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작성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라고 들었다. 소수만이 아는 어려운 한자어나 생소한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글을 쓰면 겉모습은 화려하게 치장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을 쓴 사람이 담고 싶었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의미를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대중 강연이나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라 같은 배경을 가진 청중 혹은 특수 전공서적과 같은 분야에서는 예외다.) 말과 글은 의미전달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목적을 잘 이룬 말과 글을 사용하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다.

 

이런 생각을 철학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처음에 이 책을 보며 실망을 했다. 유명한 혜민 스님의 깊은 사색과 수행에서 나오는 농도 짙은 철학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이 책을 골랐었다. 그러나 책을 집으며 훑어보고 한 장 두 장 읽어가며 기대와는 조금 다른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가벼웠다. 사실 작년 여름에 읽었던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보고 큰 울림을 받아 이 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 장을 넘기면서도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고고한 철학이 아니었다. 그럼 이 책은 의미가 없는가? 철학적이지 않은 책인가?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쉬운 철학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보며 쉼을 얻고 상처에 연고가 발라진 것을 느낀다. 대중적인 혜민 스님 특유의 넓은 공감대가 느껴진다. 최대한 많은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가볍게 건네주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감동을 느끼며 나는 책을 읽는 것보다 혜민 스님이 글을 쓰며 어떠한 생각을 했을 지에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있다. 혜민 스님은 역시 고수구나.

 

먼저 제목의 쉼표가 마음에 박힌다. 눈과 호흡이 멈춰서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듯하다. 쉼표에서 한 번 멈추니 제목이 조금 더 눈에 잘 보인다. 의도한 것일까? 멈추니 보인다.

 

“집을 직접 지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법당 공사를 하던 중에 지붕의 기와를 올려야 하는 시점이 오니까 이상하게도 제 눈에는 어딜 가나 가정집이든 절이든 지붕 위에 있는 기와들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다음엔 또 마루를 깔 때쯤 되니까 이번엔 가는 곳마다 마루만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어딜 가나 그곳 마루 나무의 결이나 색깔, 단단함 같은 것에만 눈길이 가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실을 제 스스로 자각한 순간 작은 깨달음이 있었어요.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이처럼 각자의 마음이 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을 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었어요.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은 온 우주 전체가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한정된 세상이라는 걸 새삼스레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뇌의 편집능력은 대단하다. 똑같은 사진, 똑같은 글을 보아도 내가 기분이 나쁘면 나쁜 느낌으로, 기분이 좋으면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모인 곳에 가면 늘 일이 생긴다. 선한 마음을 갖고 모인 종교단체나 일반 취미를 위한 동호회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들은 한 마디 말이나 공용 커뮤니티의 한 번의 끄적임으로부터 발생하며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글에는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때때로 알지 못한다. 이것 또한 뇌의 편집작용이다. 내가 사는 세상은 변함이 없다. 내 주위의 가족, 친구, 직장 등 명백한 환경적 요소의 변화는 내가 느끼는 감정 세상의 변화 주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길다. 그러나 ‘나의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나의 세상은 왜 이렇게 바쁘고 짜증나는 일들로 가득 차있을까?’에서 ‘나는 꽤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로의 변화는 꽤나 빠르다. 결국 내가 보는 세상은 나의 마음의 눈을 통해서 내 마음속에 사영된 세상이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다시 원만하게 되돌려주신 것이에요. 그분들의 사랑과 자비함을 믿고 지금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나를 위해 용서하세요.”

 

사실 이 문구에서 적잖이 놀랐다. 예수님과 부처님. 꽤나 유명한 ‘스님’이 대단히 많은 사람이 볼만한 책에서 한 문장에 담을 수 있는 단어라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있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편협함에 놀랐다. 물론 유일신 사상이 중요한 기독교 교리 중 하나이기에 그것 자체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글을 적으면 아무 거리낌 없는 것을. 단어의 병렬배치가 주는 같은 무게감 때문인가? 처음 읽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 자체가 내가 원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내 마음의 흔들림이 큰 것인지, 믿음이 약한 것인지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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