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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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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주
댓글 0건 조회 5,340회 작성일 19-08-09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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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유시민


사실의 기록이라는 형태는 인류가 불을 다루기 시작한 문명의 여명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동굴 내부의 원시 벽화, 이집트 피라미드의 상형 문자, 상고시대 은나라의 갑골문, 고대 수메르와 히타이트의 쐐기문자들로 기록한 점토판, 마야-아즈텍 문명의 상형문. 사기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을 남기고 후대에 전해져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예시로 든 것들은 사기처럼 사실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똑같지만 역사가들은 역사서로 분류하지 않는다.

 

역사서를 서술했다고 인정받는 최초의 사례는 서양에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歷史)’이고, 동양에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다. 키케로에 의하여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사실과 여러 정보들을 저술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당시 알려진 모든 세계를 여행하면서 수집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각지의 지리, 문화, 신화, 역사를 기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이 어떤 원인에 의하여 일어났는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신들의 도움을 받은 위대한 그리스인이 이룩한 업적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다음 시대를 살아간 투키디데스는 ‘현실주의’의 아버지이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도시국가들끼리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은 그는 확인이 불가능한 신화적 내용을 배제하고,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는 과학적인 역사 서술의 첫 번째이며, 신화로부터 역사가 독립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난 사회적 원인과 분석을 진행했으며, 이와 함께 지도자 개인의 판단에 따라서 역사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목도했다. 그리고 후대를 위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그 이유는 역사에는 비슷한 상황이 되면 반복되는 성질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폴리스들이 전쟁일 벌이는 이유를 상호간의 공포, 명예, 이익이라고 보았고, 이는 냉전시대에서도 지극히 유효한 방법이었다. 이런 사실이 극대화된 것이 ‘멜로스의 대화’라는 내용인데,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속인 멜로스를 아테네가 굴복시키려는 것을 대화로 구성한 것이다.

 

- 아테네인 : 당신들이 스파르타를 돕지 않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아테네가 멜로스를 내버려 둘거라는 생각은 관둬라.

 

- 멜로스인 : 아테네 당신들이 이해득실만 따지는데, 보편적인 원칙을 지키는 것이 좋다. 만약 당신들이 위기에 처한다면 이런 행동이 본보기로 돌아 올 것이다. 우리를 공격하면 스파르타가 도우러 올 것이니, 우리가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그대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

 

- 아테네인 : 우리 델로스 동맹은 해양국가로서 패권을 위해 너희 델로스를 굴복시켜야 한다. 그대들을 굴복시키지 못하면 우리 아테네는 약한 국가로 인식되고 동맹에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우리는 당신의 중립을 인정할 수 없다. 입장바꿔 생각하면 당신들도 우리처럼 행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지금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들의 생존에 관한 문제인데,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희망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화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멜로스는 항복을 거부했고, 스파르타의 지원도 받지 못한채 아테네에게 비참하게 멸망당했다. 이를 본다면 오히려 헤로도토스보다 투키디데스가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에 걸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헤로도토스가 이를 서술했다면 멜로스가 아테네에 멸망당한 것은 신의 섭리라는 결론을 내렸겠지만,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가 힘이 있고 패권유지를 위해서 본보기를 보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두가지 중에서 어떤 서술과 분석 방식이 역사적 사실과 흐름의 당위성을 잘 설명하는지 보일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닌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과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저술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사는 거대한 흐름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역사라는 강에서 폭포나 강줄기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면, 사마천은 역사의 전체 강줄기의 흐름을 기전체(紀傳體)라는 방식으로 작성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인류 개개인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이야기이며, 시간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천하에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아, 왕들의 흥망성쇠를 관찰하며 탐구하고, 진행에 따라 고증해서 간략히 삼대, 진나라 및 한나라의 사실을 기록했는데, 헌원에서 현재에 이르기를 12본기로 기록하여 모두 조목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사기를 서술한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왕들의 흥망성쇠를 관찰하고 탐구한다.” 투키디데스가 직시했던 반복되는 역사에 대한 분석과 후대에 전하는 교훈을 동양사를 통틀어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항우본기, 진시황본기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인물의 행적과 성격을 사실에 맞게 서술하고 끝에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항우의 경우 ‘자신의 공을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만 앞세운 채 지난 일을 배우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패왕의 업을 이루고도 힘으로 천하를 경영하려다가 5년 만에 끝내 그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몸은 동성에서 죽으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나무할 줄 몰랐으니 이게 잘못이었다.’ 라고 혹평을 내리고 있다. 항우가 죽기 직전 외쳤던 말이 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쟁을 못해서 진 것이 아니다.” 이를 보고 사마천은 항우가 정신차리지 못하고 황당한 발언이나 내뱉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진시황도 ‘진시황은 자신에게 만족하여 남에게 묻지도 않고 잘못을 범해도 고치지 않았다. 2세는 그것을 물려받아 고치지 않고 포악하게 굴어 화를 키웠다. 자영은 고립무원이라 약하고 돕는 자도 없었다. 세 군주가 잘못에 빠져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멸망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라면서 같은 혹평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 인물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서술하는데, 이는 후대에 역사가 랑케가 서술한 ‘있는 그대로의 방식’과는 다른 독보적인 방식이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역사학적으로 랑케는 ‘현대 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그가 남긴 ‘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에서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루고자 했다.’ 이는 과거를 거울삼아 인간이 발전하고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막는다는 통념을 배제한 지극히 사실적인 방법으로서, 문명이 태어난 시대의 기록 방법으로 회귀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극히 사실만을 다루기 위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사료를 철저히 분류하여 교차검증을 하는 방식은 현대 사학에서 역사를 저술하고 연구하는 방법론이 되었다. 이는 과학적 연구 방법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기존의 사실을 바라보되, 지극히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검증된 문헌이나 실험법을 이용하여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이론을 완성한다. 이런 방법론적 유사성 때문에 경제사학, 과학사학 등이 탄생하였고 이제는 인류 전체가 왜 이런 형태의 문명으로 발전했는지에 대한 역사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인류 역사의 시작은 불을 지키기 위한 것에서 시작하여, 농경을 시작하고 생산성을 높여 인류를 위협하는 자연 환경에 대한 저항력을 가질 때 이미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과학 혁명은 적대적인 자연을 인류가 보다 능수능란하게 자연을 개척하는 도구를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늘 상 궁금한게 있었다. 왜 유럽에서 과학혁명이 먼저 발생하였는가? 왜 서양문명이 다른 문명을 압도하고 보편적 문명이 되었는가? 같은 시대임에도 왜 유라시아 문명이 아메리카 문명보다 더 진일보 했던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현대에 와서 제레드 다이아몬드 의해서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대하여 적응하려고 한다는 현상을 인지한 두 사람은 문명의 차이를 환경에 두었다. 환경이란 기후, 토양, 작물 뿐만이 아니라, 국가간의 상호작용, 문화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기후와 토질이 풍부하고 동서로 넓어 식량으로 삼을 만한 작물과 가축을 쉽게 기르고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서로 다른 문명권이 형성되어 교류를 통하여 상호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밝히지는 않았지만, 상호간의 경쟁과 갈등 그리고 외부적 압박이 유럽이 결정적으로 동아시아를 압도하기 시작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비슷한 시기에 무너지고 동서양이 각국에 의한 대혼란기를 맞이하였는데, 유럽은 여러개의 국가로 분열된채로 남았고, 중국은 수문제의 재통일 이후 지속적으로 통일왕조가 수립되었다. 유럽에게는 이슬람, 러시아, 바이킹이라는 외부적 위협과 내적 종교 갈등이 지속되었고, 중국에게는 북방 유목 민족이 있었지만 도리어 동화되어 흡수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환경은 유럽 각국이 경쟁과 생존을 통하여 각자의 기술과 지식, 사상을 축적하고 이를 결정적으로 터트린 것이 과학 혁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제국주의 시대와 세계대전와 냉전 및 신냉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현재는 세계 각국이 상호연결되어 과거처럼 큰 격차는 벌어지지 않고 있지만, 역시 기술적 사상적 격차는 존재한다. 그리고 패권국가에 의한 질서가 확립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느 누가 패권을 쥐고 있느냐가 역사의 향방을 가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냉전을 겪은 역사가들은 현재 미-중 패권 경쟁을 두고 ‘신냉전’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는 시각은 개인의 욕망과 상호작용, 국가의 패권과 자존심 및 파워 게임으로 바뀌면서 서술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현재는 인류사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를 서술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올바르게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현재 일본의 상태를 봐서는 미래를 함께 하기는커녕 과거를 청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언젠가 우주로 나아가야할 인류는 힘을 합쳐 하나가 되야 하는데, 국가적-민족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지구에서 나아가기도 전에 좁아터진 우주선 안에서 싸우다가 자멸할 판이기 때문이다. 100년뒤 200년뒤 역사가들이 현재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서술할지가 참 궁금해진다. 인류가 하나가 되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진통이었을까? 아니면 국가간의 상호작용이 심화되어 갈등 표출이 극에 달한 시대였을까? 그리고 국가와 사회, 인간 사이의 갈등의 원인을 찾아내서 갈등이 해결된 인류의 보편사회가 이루어져 있을까?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한번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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