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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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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환
댓글 0건 조회 5,588회 작성일 19-07-1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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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철학 에세이 > - 김교빈·이현구

 

- 이 승 환 -

 

윤리와 사상

 

   학창시절 이승환에게는 정말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단어였다. 사춘기를 겪는 중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도덕’이라는 과목은 그저 그럴듯하게 착해 보이는 문항을 골라 적어서 내놓으면 정답으로 처리해주는 그런 만만한 과목이었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윤리’ 시간에 춘추전국시대의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상황에서 같이 일어선 사상가들이 각자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럴듯하지만, 국가를 경영해보지 못한 자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보는 것 같아 따분한 한숨을 내쉬었다. 인문계(문과)가 아닌 자연계(이과)를 선택했기 때문에 윤리 과목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우리에게 윤리 선생님은 ‘철학은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사람의 길을 걷게 한다.’라고 일러주셨다. 당시에는 그 말씀을 흘려들었고, 그렇게 지금까지 윤리와 사상에 대해 접할 길이 없었다.

 

   참, 작년 여름휴가 중 아주대학교에 들러 지도교수님이었던 김상배 교수님을 뵌 적이 있는데, 한가한 시간에 읽을 만한 책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추천해주셨다. 2018년에 사서삼경을 읽으라는 말씀에 넋이 나간 표정을 짓자,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교수님 당신께서는 연구실에 출근하면 낮에 열심히 실험하고, 밤에는 반도체 공부를 한 뒤, 새벽에 기숙사로 돌아와 사서(四書)를 읽었다고 한다.

 

   “똑똑하기만 하면 걔는 그냥 거기까지야. 아무리 우리가 엔지니어라지만 위로 올라가면 결국에는 사람을 managing하고 organizing 해야 하는 처지가 될 텐데 그때가 되면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김상배 교수님 당신께서는 석사과정 때 대학(大學)으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고 논어(論語)를 읽으며 자기를 수양하고 인(仁)으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았다고 한다. 뒤이어 박사과정 때 맹자(孟子)를 읽으며 비로소 인(仁)과 의(義)를 합치고, 중용(中庸)에서 선인들의 높은 사상을 음미하면서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여름이 찾아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을까? 처음부터 사서(四書)를 읽기에는 부담스러워 에세이로 쓰인 동양철학을 먼저 찾았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고 험난해 보이는 등산길은 셰르파(Sherpa)가 필요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 논어(論語) 中 <선진(先進)> 편 -

 

   공자의 중심 사상은 인(仁)이다. 논어(論語)에는 인(仁)이라는 글자가 무려 106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인은 주로 ‘어질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어질다는 표현만으로는 논어를 읽기에 벅찬 것 같다. 인(仁)을 자세히 뜯어보면 두 이(二)와 사람 인(人)이 합쳐진 글자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자로와 공자가 나눈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오직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중용(中庸)과 맹자(孟子)에서는 ‘인(仁)’은 ‘사람다움’으로 풀어야 한다고 한다. 공자의 관심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람다운 사람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공자는 논어(論語)의 이인(里仁) 편에서 “오직 사람다운 사람만이 정말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라고 했는데,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사리사욕이 없어서 남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다운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람다운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사람다운 사람은 정말 그 일로 피해를 보거나 위기에 처할 수 없을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다운 사람은 그에게 맞설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인자무적(仁者無敵)과 같은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숨이 끊어질 때 단 한 번으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과연 일생동안 몇 번 죽었는지 세고 싶어졌다. 공자의 관점에서 나는 몇 번을 죽어 나갔는가.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의 자세를 머리로만 이해했지,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못했다. 당장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기억, 손해 보는 것이 무서워 용기를 내지 못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문득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 뒤에는 무엇이 남는지 궁금해졌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사람답게 살다 보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인간다움을 실현하고 난 뒤에는 마음속에서 만족을 얻는 것 이외에는 달리 보상받을 일이 없다는 것이 공자 사상의 비극인 것 같다. 사기(史記)를 집필한 사마천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흉노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사형보다 더한 궁형을 받았다. 사마천은 그런 자신과 사람다움을 실천했다고 공자가 극찬한 백이숙제를 예로 들며 그런 삶은 불우했다고 평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면에서 공자 사상의 강점이 있는 것 같다.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이 이득인지 손해인지 계산하지 않고, 그 일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다 보면 사람다워진다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에는 인과응보는 없어 보인다. 당위만이 있을 뿐이다. 그 당위는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는 사명이나 소명의식이 아닐까? 역사적으로도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당위성을 따라간 수많은 좋은 예시들이 많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보이지만 그에 맞서 싸운 항일 무장 투쟁이나 나치에 대항하여 게릴라 투쟁을 한 레지스탕스 등 이러한 성스러운 실천이 공자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자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공자는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꾸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공자는 춘추전국의 난세를 겪으며 그 혼란을 바로잡고 싶어 애쓴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에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운 탄탄한 논리 위에 강한 삶의 방식이 담겨있다. 이처럼 공자를 알면 공자라는 산에 올라 공자 눈에 비친 세상을 볼 것이다. 공자 말고도 한비자, 장자라는 산에 올라도 이런 경험을 하며 삶의 두께를 더욱 두껍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동행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문화는 본래 그 지역의 종교와 사상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그 문화를 이해하려면 문화의 본질이 되는 사상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 이전에 문화의 다양성이 지역에 따른 차이로만 모습을 나타낼까? 주위를 둘러보아도 저마다 다른 생각과 가치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누구는 한비자처럼 영악하게, 누구는 임금이나 백성이나 똑같이 농사지어야 한다는 농가처럼, 누구는 노자나 장자처럼 유유자적하며 살아간다. 진정 다양성을 존중받는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낮에는 열심히 마음을 열고 다 같이 웃고 떠들다가 밤에 잠들기 전에는 하루를 돌아보며 상대방의 생각을 다시 생각해보거나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열린 마음을 갖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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